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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로운 Oct 06. 2020

지치지 않는 사이를 원해요

펭수가 말했지, "눈치 챙겨"

"세상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아름답지 않아"

"저도 알죠"


대답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내가 너무 이상적인 것인가? 내가 비현실적인 사람인가? 소위 말해 너무 따뜻한 온실 속에서 자라서 냉정한 이 세상에 적응을 못하는 걸까? 인간관계에 치여 반쯤 포기한 상태가 되었을 때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 착한 마음, 친절한 말, 예의... 유치원, 초등학교를 지나 학창 시절 내내 이 가치들을 우리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배우지 않았나. 예쁜 말 쓰기 운동을 하고, 배려상을 주고, 봉사활동 후기도 쓴다. 전 국민이 받았을 최소 10년간의 교육이 어디에 존재하는지, 이쯤 되니 의문이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공인의 행동을 이야기하는 것도, 더럽고 추잡한 사회의 뒷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개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나,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




1.

어느 평범한 날의 지인과의 식사 자리, 근황 토크로 시작된 대화에서 우리는 일상에서 아주 쉽게 이런 흐름을 마주할 수 있다. 특정 사람, 정치, 종교와 집단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 가장 흔한 예는 인터넷 뉴스 댓글란에서 신고당할 법한 어느 대상에 대한 혐오표현을 당연한 듯 입 밖으로 꺼내는 상대방.


"내 생각은 이런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가 아닌,

"너도 물론 나랑 똑같이 생각해야지"라는 의식이 깔린 채로 말을 이어간다.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의견을 말하는 것은 자유지만, 듣고 있는 상대방이 표현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 기분이 나쁘거나, 상처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결코 고려하지 않은 발언이 이어진다. 상대방은 혐오로 공격하는 그 대상을 존경하고 있을 수도, 그 대상이 가족일 수도, 또는 그 종교, 또는 그 특정 집단에 소속된 사람일 수도 있다. 상대방의 입장에 대해 조심스럽게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봤다면,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상대는 내가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는 순간 에이 그건 아니지 - 하며 나의 의견에 대한 무시와 싸움 모드로 들어선다. 그리고 나면 더 이상의 충돌을 원하지 않는 나는 말을 멈춘다.  



2.

오랜만에 만난 그는 지난번 만나서 했던 이야기의 레퍼토리를 그대로 반복한다. 한탄하듯 토로했던 그 이야기를 또다시, 똑같이 늘어놓는다. 그 대화는 핑퐁이 아닌 거의 1인극이나 독백에 가깝다. 나는 '그랬구나, 아 정말?' 을 반복하는 방청객 모드가 되고, 어느 부분에서 '맞아, 나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하며 내 이야기를 꺼내면 그는 다시 말을 잘라먹고 독백을 이어간다.  


'미안하지만, 그 이야기 지난번에 했는데 기억 안 나니... 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너의 이야기를 그대로 할 수 있단다.'


대화가 아닌 대화에서 우리는 크게 피로해진다.



3.

"어휴, 내년이면 서른인데 큰일이야."


이렇게 시작되는 '서른 살'에 대한 부정적인 대화는 어느 순간 오늘내일을 너머 80대가 된 나의 손자 손녀까지 걱정하게 만든다. 사실 나는 '서른 살'에 대해 별생각 없이 살았는데도.


"이직 준비는 하고 있어? 나는 이만큼이나 준비했는데 아직도 부족해서 미치겠어. 넌 안 그래? 걱정 안 돼?"


이쯤까지 오면 없던 생각이 옮아와서는 조바심을 치게 만든다. 이 경우 대화의 주제는 대부분 불만과 걱정이다. 딱히 해결 가능한 문제도 아니고, 따져보면 별다른 걱정거리도 아니다. 그렇지만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이 상황에서 '오 그래? 나는 행복한데?'라고 하지는 못한다. '맞아 나도 그래, 난 이런 짜증 나는 일이 있었어'라고 비슷한 톤의 콘텐츠가 이어진다. 이런 부정적인 대화의 최대 단점은 나의 온갖 에너지가 쭉쭉 빠진다는 것이다.



4.

"내 친한 친구가 있는데 금수저라 스무 살 되는 순간부터 외제차를 타고 다니더라. 지금은 건물주야."

"우리 선배인데 나랑은 언니 동생 하는 사이거든. 뭐 하나로 영국 명문대를 가서는 지금은 큰 사업을 이것저것 해. 돈은 이만큼씩 버는데 후배들 불러서 이것저것 챙겨주고..."


매번 이렇게 이어지는 대화에서 청자가 할 수 있는 반응은 '아 그래...' 이것 하나뿐이다. 그래서 방금 그 이야기가 당신과 나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모르겠다. 나는 당신의 지인에는 관심이 없고, 당신에 대해 알고 싶다. 당신의 생각, 당신의 과거, 미래, 취미, 관심사, 우리를 둘러싼 세상 이야기 등. 주변에 포진된 소위 '잘 된 사람들'의 이야기로 나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이야기를 함으로써 듣는 이는 순간이나마 소외감 또는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 남에 대한 비교는 심리적으로 어느 정도의 질투와 부러움을 가져오니까. 말하는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듣는 이는 결국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내가 존중받지 못하는 대화에서 우리는 이내 아프고 지쳐 마음을 닫는다.


어떠한 관계로 이어지는 나와 누군가의 사이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딱 한 가지이다. 나를 존중해주는 것.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배려가 나온다. 그 배려란 노약자에게 지하철 자리를 양보하는 어떤 행동이 아니라, 함께하는 나라는 사람을 인지하고 대화를 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내 생각이 이렇다는데, 내가 차마 몰랐던 상대방의 그 세세한 것까지 신경 써야 하는가?'라는 생각으로 비롯된 행동으로 인해 오늘의 나는 10년간의 학교 교육에 무슨 힘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기본적인 가치에 무감각해진 수많은 사람들이 겹치고 겹쳐 사는 이 좁은 땅에서, 마음을 다치지 않는 일상은 생존에 가까운 일이다.


당신의 의견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나의 의견도 중요하다. 내 가치관과 관심사, 내가 아는 것들과 모르는 것들은 당신과 당연하게도 다르다. 완벽하게 같은 사람은 어느 곳에도 없다. 그러니 말을 하기 전 한 번 더 생각하고, 상대방에 대해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서로를 더 알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힘든 것, 불쾌한 것, 온갖 부정적 인일들도 있지만 좋은 말과 감정도 가득하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지치기 전에, 서로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기 전에, 최소한의 관심과 최소한의 존중, 감사를 바탕으로 한 나와 당신의 사이를 바란다.


위 모든 말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눈치만 챙기면 된다. 펭수가 말했듯이.

엘리베이터에서 마스크를 쓰라는 안내문에 펭수 스티커가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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