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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로운 Oct 20. 2020

자아실현은 퇴근 후에?

내가 중심인 내 인생을 원해요

짧은 인생을 돌아보니, 직장인은 되어보지 않는 것이 마음건강에 좋다. 오래된 부엌에 묵은 기름때가 찌들듯이 사람도 찌들어간다는 것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제 보내준 매뉴얼은 읽어보지도 않고 관리자 페이지가 어렵다며 들들 볶는 업체 담당자, 옆팀과의 경쟁에서 뒤지고 있다는 사실을 참지 못하고 팀원들을 맷돌에 콩 갈듯 갈아대는 팀장님, 지난달 급하다고 맡긴 계약서를 오늘 넘겨주는 본사 매니저, 끊임없이 밀려오는 전화, 그다음에 미팅 또 미팅, 늘 해야 하는 데일리 업무, 시켜서 억지로 하는 일, 일을 위해 만들어지는 또 다른 일들... 사람들에 찌들고 스트레스에 찌들고. 두통도 늘어나고 머리카락 쥐어뜯으며 찌푸리고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 회사-집을 반복하는 빠른 시일 내로 인간이 아닌 어느 기계의 톱니바퀴 하나가 되어간다. 매일 아침 지하철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나도 그렇게 산다. 익숙해진다. 익숙함과 그 익숙함에서 오는 안정감이란 무서운 것이다.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가만, 정말 내가 이렇게 살고 싶었던가?




우여곡절 끝에 대학교 정규직 교직원으로 이직한 선배가 있었다. 좋은 직장, 높은 연봉에 안정적인 자리까지 보장된 그를 오랜만에 만난 자리, 당시 취준생, 고시생이던 모두가 그를 부러워했다.


"사실 나는 연기가 하고 싶었어."


어느 날 술자리에서 그가 툭 뱉은 말이었다.


"뭐, 자아실현은 퇴근 후에 하는 거지"


웃으면서 지나갔지만 그의 얼굴이 생생하다. 스치는 표정에 뭔가 허전한 듯한 이상한 마음이 스며들어왔다.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자아실현 아닌가? 그 이후 한참 동안 그 말이 문득 떠오르곤 했다.


자아실현은 퇴근 후라니, 취업을 해보니 퇴근 후에 나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집에 빨리 도착하면 일곱 시 반, 밥 먹고 쉬다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되는 유튜브 채널을 보며 키득거린다. 월급이 들어오니 맛있는 배달음식도 시켜먹고 쇼핑도 한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있었으니 더 이상의 글씨는 쳐다보기도 싫다. 친구를 만나서 근황 토크를 하며 스트레스를 풀어본다. 코로나 전에는 스트레스 팍팍 풀리는 코인 노래방도 사랑했다.


그러나 학생 때, 취준생 때 하고 싶은 것들을 즐기며 오는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허무해졌다. 그냥 놀았던 것뿐이다. 뽀로로처럼 누구나 노는 건 제일 좋으니까. 그렇게 잠시 즐거웠던 시간은 '자아실현'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영영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재미가 없었다.



국어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자아실현이란 , 자아의 본질을 완전히 실현하는 것이다. 자아의 본질이라니 심오하지만, 나라는 사람을 파악해야 하고, 나라는 사람의 본질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본질이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이자, 살아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심리학자 매슬로우의 욕구 위계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는 다섯 개의 단계로 이루어져있다고 한다. 1단계는 생리적 욕구, 2단계는 안전에 대한 욕구, 3단계는 소속감과 사랑에 대한 사회적 욕구, 4단계는 인정받고 존중받고자 하는 존경의 욕구, 그리고 마지막 5단계,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바로 자아실현이다.


문제는 이 자아실현의 욕구가 가장 상위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살면서 이 외의 다른 모든 욕구들을 우선시한다는 것이다.


먼저 안전하게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의식주의 안정을 생각해 돈을 벌어야 한다. 돈을 벌기 위해 인력시장에 뛰어든다. 그냥 돈을 버는 것은 의미가 없고, 사회적인 욕구 충족을 위해 어딘가에 소속되고자 한다. 회사에 취업한다. 회사를 다니다 보니 돈 벌어서 집도 좋은 곳에 장만하고 싶고, 보기 좋게 비싼 차도 타고 싶다. 더 많은 것이 갖고 싶다. 결국 끊임없는 경쟁에 뛰어든다. 더 잘해야 하고, 더 높은 곳에 오르고 싶다. 그래야 돈도 더 벌고, 모두에게 인정도 받을 수 있으며,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자리에 앉을 수 있으니까.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취업을 앞둔 많은 이들은 대기업, 공무원, 공기업 등 좋은 직장, 높은 연봉, 안정된 자리를 목표로 달리게 된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결과가 나의 자아실현과 맞물린다면 완벽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아이러니한 것이다. 힘들게 들어간 직장을 때려치우고 나온다. 이 것은 내 길이 아니라고,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바로 오늘의 내 모습이다. 어디든 들어가서 일해보자, 월급 주고 뭐든 시켜달라, 야근에 지쳐도 좋으니 좋은 직장으로의 점프를 위해 온몸을 바쳐보겠다는 마음으로 일을 한 후. 그간 있었던 모든 힘듦이 결국은 나의 선택으로부터, 우선적으로 충족되어야 했던 그 모든 욕구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돌아보게 된다. 아프고 다칠 만큼 다쳐서 불행했다.



돈은 벌어야겠지만 돈을 위해 살고 싶지는 않다. 회사에 들어와 진절머리 나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돈이 오고 간다. 싸게 달라고 한다. 마진 네고가 오간다. 우린 마케팅에 돈을 이만큼 쓰니까, 우리 판매실적은 이러이러하니까. 블러핑이 환심을 산다. 상품을 하나라도 더 팔아야 하고, 그 실적에 온 직원들이 매달렸다. 나의 직군이 무엇이건 회사가 모두를 장사꾼으로 만들었다. 잘 팔리면 좋고 잘 나가면 신명 난다. 자본주의의 맛은 MSG 같아서 그 맛에 중독된 사람들은 심심한 것에는 맛을 느끼지 못한다. 내가 그랬다. 그러다 현타가 오던 날이 있었다. 돈돈돈, 그놈의 돈, 내가 원했던 내 모습이 이런 장사꾼이었나. 이것 때문에 울고 웃는 마음의 병이었나. 시장의 가치에 자신을 잃어가는 것이 나는 싫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은 어렵다고 한다. 그러니 적절하게 돈을 잘 벌면서 퇴근 후에 자아를 찾으라 한다. 그게 무슨 자아 찾기인가 싶다. 앞에서 말했듯, 그건 그냥 그 순간만 노는 게 제일 좋은 뽀로로가 되는 것뿐이다.


무에서 유가 되었지만 다시 무로 돌아가자.나는 이제와 진짜 자아실현을 꿈꾼다. 아직은 명확하지 않지만 틀을 잡아나간다. 내가 사는 이유를 찾고, 진짜 하고 싶은 것을 찾고, 그 가치에 나를 쏟아붓는 것을 꿈꾼다. 너무 이상적인 소리 같지만, 삶의 모든 순간에서 온전한 내가 되 바란다. 다양한 기회를 찾으며 나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내가 중심인 미래를 찾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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