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우는 것을 나의 본업으로 삼자

당신의 비상구는 켜져 있는가?

by 송윤환

회사 복도를 걷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열심히 일하고 있는 우리 모두는, 사실 '퇴사 예정자'가 아닐까?


누군가는 3년 뒤에, 누군가는 10년 뒤에, 또 누군가는 내일 당장 이 회사를 떠날 것이다. 평생 한 회사에 다니는 시대는 이미 옛말이 되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야 한다. "이 회사에서 어떻게 살아남을까?"가 아니라 "이 회사를 떠난 후에는 나는 어떤 사람일까?"

지난주 우리 팀 막내 금홍이가 물었다. "형님, 이 업무 계속 맡으면 커리어에 도움이 될까요?"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이렇게 답했다. "금홍아, 네가 이 일을 통해 무엇을 배우느냐가 중요한 거야. 이 일 자체가 너의 커리어가 되는 게 아니라, 이 일을 하면서 키운 '너'가 커리어가 되는 거지."


정리력이라는 무기

이직한 이커머스 회사에서 11년째 일하며 깨달은 게 있다. 일 잘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능력이 아니라 '정리력'이었다. 작년 여름, 우리 팀은 대규모 프로모션을 준비하고 있었다. 할인율을 얼마로 할지, 어떤 상품을 메인으로 내세울지, 배송 정책은 어떻게 할지... 영업팀, 마케팅팀, CS팀, 물류팀의 의견이 모두 달랐다. 회의는 자주 그렇듯이 또다시 산으로 간다.

그때 선배 남규 형이 했던 말이 아직도 귀에 남아있다.

"얘들아, 지금 우리 상황을 바다에 비유하면, 모두가 어디로 노를 저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야. 근데 선배인 내가 해야 할 일은 간단해. 정리하고 책임지는 것. 딱 두 가지야."

그는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30분 동안 모든 의견을 듣더니, 마치 정해진 뱃길이 있었던 것처럼 방향을 정리했다. "자, 우리는 신규 고객 유입에 집중한다. 할인율은 20%로 고정하고, 메인 페이지에는 구매빈도가 높은 상품 top 10을 배치한다. 배송 이슈는 물류팀과 내일 오전까지 정리하고, 나머지는 상품 상세 페이지 최적화에 집중하자."

그 순간 회의실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우왕좌왕하던 팀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각자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해진 거다. 회의실에 올 땐 텅 빈 머리일지라도, 회의실에서 나갈 땐 각자 할 일을 명확히 알아야만 한다. 이게 리더의 역할이고, 결국 나 자신을 키우는 방법이기도 하다.


정시 퇴근법의 비밀

우리 회사에는 전설같은 선배가 한 명 있다. 상품기획팀 출신으로 지금은 영업 총괄을 맡고 있는 세광 선배. 그는 항상 6시에 퇴근한다. 처음엔 의아했다. 이커머스 업계에서, 그것도 총괄급이 어떻게 매일 6시에 퇴근할 수 있을까? 어느 날 용기 내서 물었다.

"선배님, 비결이 뭐예요?"

그는 웃으며 자신의 달력을 보여줬다. 하루가 30분 단위로 쪼개져 있었다.

"나는 시간을 잘게 쪼개서 밀도 있게 써. 오전 9시부터 6시까지 체력을 100% 다 소진하는 거야. 그래야 집에 가서 온전히 쉴 수 있어. 그리고 그 시간에 나를 키워."

그날 이후 나도 따라해봤다. 오전에는 데이터 분석과 기획 작업, 점심 후엔 회의와 협업, 오후 4시부터는 마무리와 내일 준비. 처음엔 힘들었지만, 신기하게도 야근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퇴근 후 생긴 시간에 온라인 강의를 듣고, 책을 읽고, 사이드 프로젝트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6시가 되면 체력을 다 소진해야 한다. 그래야 회사가 나를 갉아먹는 게 아니라, 내가 회사를 밟고 성장할 수 있다.


숟가락 얹는 기술의 재발견

"또 숟가락만 얹으려고 하네."

회의 중에 이런 말이 나오면 분위기가 싸해진다. '숟가락 얹기'는 보통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남의 공을 가로채는 비겁한 행위처럼 들린다. 하지만 지난달 우리 팀에서 있었던 일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마케터 중용형이 좋은 아이디어를 냈다. 고객 리뷰를 활용해서 새롭게 상품 상세 페이지 레이아웃 하는 것이었는데, 솔직히 원석 그 자체였다. 좋긴 한데 뭔가 2% 부족했다. 그때 데이터 분석가 성현형이 끼어들었다. "이거 좋은데, 여기에 구매 패턴 데이터를 더하면 어때? 이 상품을 산 사람들이 함께 구매한 아이템도 같이 보여주는 거지." 그러자 막내 금홍이 덧붙였다. "그럼 UI도 카드 슬라이드 형식으로 바꾸면 모바일에서 보기 편하겠네요!"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좋아. 그럼 리뷰 중에서도 포토 리뷰를 최상단에 배치하자. 전환율이 20% 이상 오를 거야."

결과는? 매출이 30% 뛰었다. 중용형의 아이디어는 빛을 발했고, 팀 전체가 함께 성장했다.

이게 진짜 숟가락 얹는 기술이다. 좋은 아이디어에 옷을 입혀주고, 신발을 신겨주고, 머리도 매만져주고, 심지어 날개까지 달아주는 것. 누군가의 공을 빼앗는 게 아니라, 함께 더 크게 만드는 거다. 이커머스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영업, 마케팅, 개발이 모두 맞물려 돌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아이디어에 숟가락을 얹으며 함께 성장한다.


당신의 비상구는 켜져 있는가

작년 이맘때쯤, 번아웃이 왔다. 매일 밤 11시까지 야근하고, 주말에도 KPI 목표달성에 시달렸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지?"

그 순간 영화관에서 본 비상구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초록색 불빛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비상구의 불은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항상 켜져 있어야 한다. 나에게도 비상구가 필요했다. 회사 일만이 전부인 삶에서 탈출할 수 있는 출구. 나는 퇴근 후 예전에 좋아했던 러닝을 다시 시작했다. 주말엔 러닝 크루와 함께 달리며, 회사일은 철저히 잊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비상구를 만들어두니 회사 일이 덜 답답했다. '이게 전부가 아니야'라는 생각이 오히려 일을 더 잘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러닝 경험은 나중에 축구, 테니스 등 다양한 운동을 할때 큰 도움이 됐다. 비상구는 도망치는 곳이 아니다. 내가 숨 쉴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 숨이 결국 회사 일에도 새로운 에너지를 준다.


Life itself will let you know

얼마 전 후배 하나가 고민 상담을 왔다. "형님, 저 이 일이 맞는 건지 모르겠어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구요." 나는 10년 전의 나를 봤다. MMORPG 게임회사에 다니다 이직한 직후에 나도 똑같은 고민을 했었다. 그리고 지금? 여전히 완벽한 답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알게 됐다.

Life itself will let you know.

인생 그 자체가 답을 알려줄 거다.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신나는지, 어떤 순간에 성취감을 느끼는지, 어떤 사람들과 있을 때 에너지가 생기는지. 그걸 알려주는 건 계획표가 아니라 매일매일의 경험이다.

그래서 중요한 건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 '나를 키우는 것'이다. 회사 일을 핑계로 나를 방치하지 않는 것. 매일 조금씩이라도 내가 성장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는 것.


결국 본업은 '나'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회사에서는 블랙프라이데이 대규모 프로모션 준비가 한창이다. 나는 여전히 바빠서 정신없고, 매출 목표에 쫓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 모든 경험이 '나'를 키우고 있다는 것을. 정리하는 법을 배우고, 책임지는 법을 익히고, 시간을 쪼개는 기술을 체득하고, 함께 성장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는 것을.

회사는 언젠가 떠날 곳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키운 '나'는 평생 함께 갈 자산이다.

나를 키우는 것을 나의 본업으로 삼자.

그리고 오늘도 6시에 퇴근해서, 비상구의 불을 밝히러 가자. Life itself will let you know.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지를.

"우리 모두는 퇴사 예정자다. 그러니 회사가 아닌, 나 자신에게 투자하자."


끝.


* 내 일로 가는 법 (저자 김민철)에서 문장을 일부 사용하여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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