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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열아들 부럽지 않은 딸입니다.

by Nancy

한 번씩 친구들과 부모님에게 겪은 차별 이야기들을 논할 때면 너도나도 맞장구치며 각자 겪은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할머니가 남동생과 자신을 차별하면서 용돈을 주신 이야기, 공부를 잘하는 언니와 비교당한 이야기 등등. 나 또한 할 말이 많았지만 왠지 모르게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 완전히 솔직하게는 다 털어내지 못했던 것 같다.


나의 지인들은 내가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딸 같은 느낌이 있다고 한다. 아버지에게는 놀림거리 투성이었던 삘이이자, 동시에 엄마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귀한 공주였으니 반은 사실이고 반은 아니라 할 수 있겠다.



대학교 시절, 친하게 지내던 친구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와서 술 한잔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적이 있다. 그 친구도 나처럼 오빠가 한 명 있었다. 친구는 자신의 전공이 아닌 다른 쪽으로 배우고 싶은 분야가 생겼지만 부모님이 반대한다고 했다. 당시 친구는 부산에 있는 한 4년제 대학교에 재학 중이었고, 오빠는 보컬의 꿈을 안고 예술대학교에 진학하였고 내가 알기로는 서울에서 2년 정도 지내며 트레이닝을 받기도 했다. 물론 생활비용과 교육비는 부모님께서 지원해주셨다. 부모님은 그 친구가 대학교 진학한 김에 남들처럼 취업하여 어서 자리를 잡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오빠에 비해 많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자신의 꿈을 접어야 하는 상황에 있는 친구는 많이 심란해하며 소주잔을 비웠다.

게다가 나중에는 그 친구가 취업하여 받은 월급을 부모님께 드렸는데, 그 중 많은 부분이 오빠의 학자금으로 쓰였다고 했다.


얼마 전에는 몇 년 만에 고등학교 시절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대학교를 두 번 다녔다. 한 번은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지방 국립대에 진학하여 다니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휴학을 길게 하다 그만뒀고, 이후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꿈을 찾아 수능시험을 다시 치르고 한국전통예술대학교에 입학하여 전통건축학을 배웠고, 27살에 학사 학위를 취득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시절 용돈을 하나도 받지 않는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늘 그렇듯 어린 시절 친구를 만나 하나둘 추억거리를 꺼내 곱씹다 가족 얘기를 나누었다. 그 친구 아버지께서는 심리학에 관심을 두시고 최근에는 사이버대학에서 심리학 강의를 듣는다고 했다. 어릴 때는 무뚝뚝한 아버지셨는데 요즘 들어 대화를 많이 나누게 되었다며, 아버지는 아동심리학을 비롯해서 여러 심리학 이론을 공부하다 보니 어린 시절 너의 마음에 귀 기울이지 못했던 것 같다고 후회되는 바가 많다고 말씀하신다고 했다. 그 친구도 돌이켜보니 자신은 하고 싶은 것이나 원하는 것, 아주 사소하게는 먹고 싶은 것조차 부모님께 말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 이유가 뭐냐 물으니, 부끄러웠다고 했다. 그 친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30대가 되어 생각해보니, 자신이 좀 억울했던 것 같다고 표현했다. 남동생이 한 명 있는데 남동생과 자신이 똑같이 생활했다면 그런 마음이 안 들었을 텐데 남동생과 자신은 달랐다고 한다. 자신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교복을 스스로 세탁하고, 빨래가 귀찮아서 어떤 날은 때가 타고 쭈글한 교복을 입고 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남동생은 밥 먹다가 '물'이라고 외치면 엄마가 물까지 떠다 주는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어떤 친구는 결혼할 때 자신이 모아놓은 돈 2천만 원은 키워준 부모님을 위해 모두 드리고 결혼하기도 하였고, 어떤 친구는 남편이 당연한 듯이 결혼할 때 이제껏 모은 돈을 친정 부모님에게 모두 드리고 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열 아들 부럽지 않은 딸


나는 세상에 흔한 많은 딸들 중 하나이면서, 역설적이게도 그 딸들처럼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 내가 결혼을 결정할 때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즐거운 시간을 함께하고 싶은 생각이 컸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느 한 가족의 딸로서만 살기보다 나 자신으로서의 삶을 살고 싶었던 마음도 작용했던 것 같다. 내가 열아홉 살, 스무 살의 목표를 '인 서울로 하여 독립생활하기'로 잡았던 것도 결국 그런 마음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내가 선택한 내 사람과 가정을 꾸려 살면 오롯이 독립하여 나 자신의 삶을 산다고 생각했다. 물론 결혼 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역할과 기대들이 추가된다는 것은 그땐 알지 못했지만.


물론 딸바보 부모님들도 많고 아들에 비해 과보호받으면서 자란 딸들 덕에 늘 양보하거나 혼나면서 자란 아들들도 많을 것이다. 나는 편 가르기 하고자 글을 쓰는 것을 아니다. 다만 세상의 많은 딸들이 속상했던 마음을, 그들을 대신하여 한번쯤 표현하고 싶었다. 나 또한 한 번쯤은 부모님에게 표현하고 싶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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