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개의 글쓰기 13
사냥은 실패했다.
동굴로 돌아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우두머리 ‘날카로운괴성'이 차라리 그 자리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분노라도 했으면 마음이 덜 무거울 것 같다.
모두 발걸음이 무겁다. 텅 빈 사냥 그물은 그보다 더 무겁다.
원래 약속은 이랬다. ‘바람보다빠른발'이 검은 목 긴 뿔 소를 자극해서 꾀어 온다. 대기하고 있던 ‘높이뛰는큰발'이 교대해서 바위벽 쪽으로 유인한다. 숨어 있던 나와 ‘오래된목소리'가 덩굴 덫으로 뿔 소의 다리를 걸어 쓰러뜨리고, 우두머리인 ‘날카로운괴성'이 돌창으로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내가 무리에 쓸모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했다.
검은 목 긴 뿔 소는 성격이 급한 놈이다. 풀을 먹는 다른 놈들은 위협을 느끼면 도망을 가는데, 이놈은 도리어 뿔을 앞으로 들이밀고 달려와버린다. 검치호들 조차 사냥하기 꺼려하는 놈들이다. 그러나 준비와 약속만 잘 이루어지면, 사냥을 시도할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이 놈들은 일단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하면 쉽게 멈추거나 방향을 틀지 못하기 때문이다.
‘날카로운괴성'의 신호가 떨어지자, ‘빠른발’은 약속한 대로 뿔 소를 약 올리기 시작했다. 새끼들 쪽으로 가서 어슬렁거리는 것만으로도 수컷 뿔 소 몇 마리가 목을 세우고 경계를 시작했다. 역시나 동물이든 사람이든 새끼는 소중하다.
“휘이오호이오호이"
빠른발의 저 소리는 묘하게 신경을 거슬리게 만든다. 그는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절한 거리를 찾기 위해 천천히 앞 뒤로 움직이며 나갔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바닥에서 돌을 들었다. 사실 돌팔매는 내가 빠른발보다 낫다. 그럼에도 나는 발이 느려 사냥에선 도무지 쓸모가 없다.
빠른발은 허리를 뒤틀고 오른손을 뒤로 뺐다. 왼팔로는 맞추려는 뿔 소를 향하는 것이 거리를 가늠하는 모양새다. 뻐드렁니가 솟은 입을 꾹 다물고, 양 미간에 깊은 골을 만들었다.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이 먼 거리에서도 눈에 훤히 보인다.
휘어진 버드나무같이 무게중심을 최대한 뒤로 했던 빠른발이 순식간에 돌을 집어던졌다. ‘팽’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느낌이다. 돌은 뿔 소를 맞추지 못했다. 그럼에도 신경을 곧두세우던 무리의 수컷을 자극하는 데는 성공했다.
꿔허허어엉 하는 분노에 찬 뿔 소의 소리와 함께 빠른발 쪽으로 뛰기 시작하는 놈들이 보인다. 빠른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높이뛰는큰발’이 대기하고 있는 언덕 쪽으로 뛰었다. 검은 목 긴 뿔 소는 처음에 뛰는 속도가 느리다. 일단 속도가 붙기 시작하면 모르겠으나 빠른발이라면 그전에 어떻게든 몸을 뺄 수 있을 거다. 먼저 언덕 쪽으로 유인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지켜보던 ‘오래된목소리'도 입이 바짝 타들어가는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이 난리 속에서도 두광 두광 거리는 심장 소리도 들린다.
한참을 앞서 뛰던 빠른 발의 속도가 점점 늦어진다. 젠장. 저대로라면 뿔에 받칠지도 모른다. 이제 거의 다 도착했다. 조금만 더… 제발…
언덕 위 커다란 물푸레나무 옹이에 발을 걸치고 대기하고 있던 ‘높이뛰는큰발'이 빠른발을 제대로 잡아챘다. 빠른발은 큰발의 도움으로 나무 가지에 기어올라 몸을 바짝 붙이고 줄기를 끌어안았다. 이제 높이뛰는큰발 차례다.
물푸레나무에서 뛰어내린 큰 발은 “아히오후이히호!!” 소리 지르며 우리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뿔 소 입장에서는 급격히 방향을 바꾸어 다시 아래로 도망치는 것처럼 보였을 게다.
정면으로 뛰어오는 큰발의 눈은 전혀 용감하지 않았다. 절박함과 깊은 공포가 그대로 뿜어져 나왔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땀이 뒤범벅이 되어 이쪽으로 달릴 뿐이다. 어쩌면 우리도 지금 저런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덩굴을 쥔 손이 땀으로 가득하다. 대충 털옷에 비벼 닦았다. 덩굴을 놓칠 것 같아서 오른손을 돌려 두어 바퀴 손목에 감아버렸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높이뛰는큰발은 지나 보내고 뿔 소가 통과하기 직전 ‘오래된목소리’와 함께 이 덩굴을 당기면 되는 일이다. 마음을 차분히 하자.
툭 탁탁탁 큰발이 달려오는 소리 뒤로 따라오는 뿔 소의 달려오는 소리는 두두두둑 천둥소리처럼 크다.
“키이이히아아악"
마지막까지 힘을 짜내 소리 지르며 큰발은 숨어있는 우리에게 신호를 주고 바위벽 틈 사이로 몸을 던졌다.
자. 이제 우리 차례다.
하나… 숨을 들이쉰다. 덩굴 줄을 꽉 쥐었다. 흙에 잔뜩 지저분해진 손등으로 힘줄이 솟는다. 하도 꽉 쥐어서 일어난 덩굴 가시가 손바닥을 찌르지만 아프지도 않다. 손톱이 살을 파고든다.
두울… 투두닥 달리는 소리가 거의 내 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다. 몸과 어깨를 뒤로 하며 덩굴을 당겼다. 이 덩굴 함정에 뿔 소의 다리가 걸리면 앞으로 꼬그라들거다. 속도를 못 이긴 뿔 소는 저 돌벽에 머리를 박고 정신을 못 차리겠지. 그러면 우두머리인 ‘날카로운괴성'이 뿔 소의 숨통을 끊을 거다. 그리고 사냥은 마무리되고, 오늘 밤은 고깃덩어리로 배를 채울 수 있을 거다.
온 힘을 다해 덩굴을 잡아챘는데 순간 너무 많이 당겨져 왔다는 느낌이 왔다. 뭔가 잘못된 거다. 함께 덩굴을 당겼어야 할 오래된목소리가 내 힘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끌려와 버렸다. 팽팽했어야 할 덩굴 함정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난 그대로 호되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망연자실 앉은 내 앞으로 뿔 소가 지나간다. 그 순간 뿔 소의 까만 눈이 비웃는 것처럼 보인 것은 착각이 아니다. 흥분했을 때는 앞뒤 가리지 않고 뛰지만 사실 저 놈들은 무척 영리하다. 우리가 자신들을 사냥할 계획에 실패했음을 안 것이다.
뿔 소는 바위 벽을 피해 길게 돌아 다시 무리로 유유히 들어가 버렸다.
오래된목소리는 우두머리인 날카로운괴성에게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했다. 내가 당기는 힘을 이기지 못했다고, 그 잠깐의 순간에 정신을 집중하지 못했다고 했다.
아니다. 사실은 내 잘못이다. 우리는 언제 줄을 당길지 정했어야 했다. 날카로운괴성도 그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렸다. 내가 흥분해서, 무엇인가 보여주어야 한다는 급박한 마음에 덩굴을 당겨버린 것이 맞지만… 우리는 정확한 명령체계를 만들지 못했던 거다. 미처 준비되지 못한 이 사소함에 오래된목소리는 앞으로 넘어져버린 것이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배고픔은 무서운 일이다. 동굴의 암컷들과 아이들이 열매나 뿌리라도 모아두었으면 하지만… 과연 그걸 먹을 자격이 내게 있는지 알 수 없다. 차라리 날카로운괴성이 그 자리에서 분노라도 했으면...
세상에서 빈 사냥 그물보다 무거운 것이 또 있을까…
….
…
나는 그렇게 아내에게 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원시 공동체에서 진화해온 인간 수컷은 정확한 명령 체계에 반응하도록 훈련된 것이다.
따스한 봄볕에 오래간만에 빨래를 잔뜩 돌려 널어놓았던 아내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야! 헛소리하지 마! 아니 내가 사냥해오래? 그냥 빨래 걷으라고 했잖아!”
“그래. 그래서 내가 빨래 걷었잖아!”
그렇다. 간만에 쉬는 날이라 나는 TV로 LOL 2017 스프링 시즌 SKT1 vs ROX 타이거즈 녹방을 보고 있었다. 아내는 잠깐 운동 다녀온다며 나에게 ‘빨래 걷어 놔!’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빨래를 걷어 놓고 페이커의 현란한 무빙과 뱅과 울프의 환상 바텀 궁합을 넋 놓고 보고 있었을 뿐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야! 이 닝겐아!! 빨래를 걷으라고 했으면 그다음에는 당연히 개 놓는 것이 정상이잖아!”
이건 억울하다.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처음부터 분명하게 ‘명령'했어야 한다.
‘빨래를 걷은 후, 개 놓아라'라고 말이다.
이건 내 탓이 아니다! 남자는 정확하게 말해주어야 한다. 어설프게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거 말고! 아주 단호하게!
‘김민성. 그거 1시간 안에 끝나지? 나 운동하고 들어올 테니까. 그거 끝나기 전까지 빨래 걷어서 개놔. 수건은 3단으로 접어 욕실에 넣고, 웃옷은 작은 방 서랍에 넣고, 긴 옷은 옷걸이에 걸어놔. 알았지? 나 보고 대답해!’라고 했다면… 난 분명히 모든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니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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