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나는 광주사람이 되었다.

100개의 글쓰기 24

by 김민성


호남.

민주화의 성지.

대한민국은 광주에 빚을 졌다… 이런 이야기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다.
솔직히 95년 광주로 대학 와서야 5.18에 대해 알았다. 막연히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광주사태...라는 말로 배우기는 했지만 어떤 것인지 몰랐던 거다. 게다가 난 신학대를 다녔기에 이런 쪽은 더 늦었었다.
당시 양림동 호남신학대 아래에는 미국문화원이 있었다. 도청 앞에서 시위를 하면 학생들은 미문화원이 있는 양림동 쪽으로 밀고 오고는 했다. 덕분에 최루탄 냄새도 맡아보고, 학교 옥상에서 시위하는 걸 구경하기도 했다.


그렇다 내겐 남 일이었다.


그러다 5월이 오자 광주 공기가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뭐라고 말로 쉬 설명할 수 없는 무겁고 끈적한 그 무엇이었다. 우울함과 슬픔의 안개가 광주를 덮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학생들의 시위는 더 격렬해졌다. 학교 도서관에서 쓸데없는 책을 뒤적거리다 한밤중 자취방으로 돌아가던 길, 골목 어귀에서 ‘좆같은 전두환이 씨발놈아!’라고 울분에 차 소리 지르던 아저씨를 만나기도 했다.


담배 팔던 작은 슈퍼집 나이 많은 아주머니 말로는 그 아저씨의 형님이 5.18 때 공수부대에게 죽었다 했다. 평소에는 너털웃음 짓는 순한 사람인데, 5월이 되면 꼭 저런다고 혀를 찼다. 짠하다고…

그 형님이 사실은 동생이 밖에서 안 들어와 걱정되어 찾으러 갔다가 못 돌아온 거라 했다.


그 순간이 지독하게 이질적이었다. 그냥 드라마에서나 봤던 장면들이 강제로 현실과 동기화되는 느낌이었다.


신학대학도 그때만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는지 채플 시간에 민주화에 대한 설교가 나오기도 했었고, 마스크에 검정 매직으로 X자를 그려 그걸 쓰고 양림동 일대를 걷는 침묵시위를 하기도 했다. 그 나름의 저항이었다.


5월 17일 아침 선배들이 오후에 도청에 가자고 했다. 뭔지도 모르고 그냥 알았다고 했다.
그 날 우리는 점심을 금식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수업을 마치고 선배들을 따라 도청을 향해 걸어내려갔다. 광주천을 따라 1957년부터 극장이라는 태평극장을 지나 금남로로 향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람 많은 곳에 가면 정신 사나워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곳엔 평생 처음 볼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더 신기한 것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데 질서 있었다는 거다. ‘인의 물결’이라는 말이 어떤 것인지 그 안에 뛰어들어 느꼈다. 선배들은 혹시 흩어지면 충장로 우다방(우체국 앞 커피자판기)으로 모이자고 했다. 사막의 천천히 흐르는 유사처럼 사람을 따라 흐르듯 움직였다. 그리고 멈췄을 때는 도청 앞에 세워진 5.18 전야제 무대가 멀리 보이는 충장로 도로 한복판이었다.

평소라면 차가 달릴 도로 바닥에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앉아있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저 멀리에서부터 시작된 노래는 끝없는 돌림노래로 출렁거렸다. 어디는 동지는 간 데 없이 깃발만 나부낀다 노래하고 있었고, 또 다른 쪽은 산자여 따르라며 절규하고 있었다. 지휘자 없는 거대한 합창단이 제각각 자기 부르고 싶은 대로 노래하지만 그 자체가 화음이 되고 울림이 되어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평생 처음 겪는 전율이었다.


저 앞 무대 위에서는 노래패가 분위기를 이끌었고, 5월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시민 극단이 연극을 통해 보여주었다. 곳곳에서 탄식과 비탄과 울음과 절규가 튀어나왔다. 5월이 되면 광주는 한 집 건너 한 집이 제사라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울었다.

길바닥 한가운데서 난생처음으로 내가 경험하지 않은 일로 인해, 생판 남이 겪었을 삶이 그리고 그 한이 너무 슬프고 절절해서 펑펑 울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을 내가 몰랐다는 것이 부끄럽고 죄송해서 울었다.


웃었다.

저 앞의 무대 위의 사회자가 던지는 별 것 아닌 익살에 참을 수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실은 사회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웅웅 거려 잘 들리지 않았다. 뭔 소리인지 잘 이해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웃지 않으면 그 큰 슬픔에 짓눌려버릴 것 같은 기분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앞에서 웃으면 배가 아플 정도로 따라 웃었다.


5월 길바닥 한가운데 철퍼덕 주저앉아. 나는 드디어 호남 사람이 되었다. 광주 사람이 되었다.


밤이 깊어지고 무대 위의 순서는 끝이 났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사람들은 주섬주섬 일어나 어깨동무를 하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보는 아저씨와 같이 갔던 선배와 어깨동무를 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마치 그것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사람들은 서로 어깨를 걸고 뛰기 시작했다.


뭐라고 구호도 외쳤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민주주의, 언론자유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사실 그보다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계속 불렀던 것 같다. 이 사람들은 아는 노래가 그것뿐인가 싶을 정도로 부르고, 부르고 또 불렀다.


충장로 골목골목을, 금남로 골목골목을 그렇게 어깨를 걸고 뛰어다녔다. 나중에는 하도 힘들어서 선배랑 어깨를 풀고 옆으로 빠져 주저앉아버렸다. 가로등 켜진 전봇대 아래 앉아 하늘을 쳐다보는데 달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선배랑은 서로 별 말도 않고 멍하니 한참을 앉아있었다.


저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또 어깨를 걸고 뛰어 왔다.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우리 앞을 지나갔다. 선배와 나는 다시 어깨를 걸고 그 뒤에 가서 붙었다. 그렇게 새벽이 올 때까지 미친놈들처럼 이 무리, 저 무리 옮겨 다니며 뛰어다녔다.


탈진하다시피 새벽 무렵 학교로 들어와 화장실에서 대충 씻고 선배 기숙사 구석에서 쓰러져 잠들었다.

정신을 차리니 5월 18일이었다.


수업시간에 잤다. 공강 시간에도 도서관 가서 엎어져 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골목에서 며칠 전 울분에 차 욕하던 아저씨를 마주했다. 슈퍼 앞 작은 평상에 소주 한 병 놔두고 앉아 있는 그 모습을 마주하자 나도 모르게 그분께 꾸벅 인사하게 되었다.


모르는 대학생이 자신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하자 아저씨도 당황하신 듯 맞인사 했다.

그리고 서로를 지나쳤다. 아저씨는 남은 술을 기울였을 것이고 나는 피곤한 몸을 질질 끌고 자취방에 들어와 쓰러져 다시 잠들었다.

나는 그 날 내가 광주에 동화되었음을 조금, 아주 조금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광주 사람이 되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일부 세력에 의해 부정당하고 있다.
가슴이 아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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