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미련. 그래서 다시

100개의 글쓰기 27

by 김민성


6살 언니 하음이는 요리사가 되고 싶단다.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서 엄마 줄 거라고 했다. 쌍꺼풀 짙은 눈을 반짝거리며 크게 소리친다. 유치부 예배를 진행하는 선생님이 율동하기 전에 지나가는 말로 ‘여러분 이다음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요?’하고 물었더니, 저 예쁜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 지른 거다.

“요오리사가 될 거예요!!!”


하음이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예쁘게 휘었다. 그리고 계속 소리 지른다.


“선생니임! 그리고요오! 가수도 될 거예요오!!”


아직 아이들이 많이 오기 전이라 그냥 조용히 이야기해도 들릴 법 한데… 하음이는 위풍당당하게 소리친다. 턱 괴고 멍하니 보고 있다가 그 모습에 웃음이 쿡 나왔다.


어른이 되는 것은 되고 싶은 것이 하나씩 사라지는 일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나도 사실 해보고 싶은 일이 꽤 많았다.
어릴 때는 유전공학자나 동물학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나와 관련된 애완동물들이 단명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포기했다. 나는 애완 동물계의 코난이나 김전일로 알려질 테니 말이다.

거대 로봇을 만드는 공학자를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건담을 만들면 꼭 부품이 남는 것으로 보아 안되기를 잘 했다고 생각한다. 지구를 지키는 정의의 파일럿들을 내 손으로 보내버릴 수는 없지 않겠는가…


조금 자라서는 연극배우나 뮤지컬 배우가 멋지게 보였다. 성악가가 되어 무대에 서는 것도 멋질 것 같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해남에서 이런 걸 배우려면 어찌해야 할지 몰랐고, 어머니가 컴퓨터를 사주신 이후 게임에 빠져 이건 잊히게 되었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작가, 기자, 카피라이터 이런 거 생각해보았었다. 그러나 PC통신 게시판에서 작가도 아닌 사람들이 올린 글들을 보면서 난 글에 대해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고3 때 교회 전도사님이 신학 해보는 것이 어떠냐 해서… 신학대학교에 갔지만 나라는 인간이 평생 다른 사람의 영혼을 생각하며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만 깨닫게 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상황과 환경과 여건… 이런 필터가 겹치면서 정작 하고 싶은 것이 없어져버린 것이다.

어느 날 주위를 둘러보고 꽤 안심했다. 비겁한 생각이지만, 나만 이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모습으로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난, 무엇이 되고자 했는데 쉬이 이루지 못해 아파하는 사람에게 깊은 연민과 동지애 같은 것을 느낀다. 동시에 내 모습이 투영되어 짜증이 나 보고 있기 힘들다는 감정도 올라온다.


아마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인상 깊게 남았던 이유가 거기에 있을 거다.

아내는 자신을 동화작가라고 소개했다. ‘동화작가 임지형’이라는 이름이 또르륵 구르는 알사탕처럼 입 안에서 굴렀다.

그녀는 자신이 쓴 작품 이야기나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마음에 대해서, 창작할 때 문득 다가오는 외로움과 고독 같은 감정에 대해서, 가슴에 꽂히는 하나의 단어를 찾기 위해 처절하게 고민하는 삶에 대해서, 쓰고 고치고 쓰고 고치고 쓰고 고치는 지난한 과정 속에서 작품 하나를 끝내고 정신 차리니 새벽 해가 뜨더라는 작가의 삶 따위 이야기하지 않았다. 거의!

그냥 도대체 자기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푸념과, 하도 답답해서 사주 보러 갔더니 작가 하기를 잘했다더라는 용한 철학관 이야기와 후배들과 나이트 가서 가명을 '보라'라고 했다는 활극과 발 뼈에 암처럼 보이는 것이 생겨 골수암으로 죽을지도 몰라 무서왔다는 경험과 그 날 친한 언니들이 암은 소주 마셔도 된다며 알콜로 위로해 줬다는 등의 이야기를 네 시간 동안 들려주었다.
나름 꽤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끌리게 되었다.


아내는 나와 결혼하고 9권의 책을 더 냈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슬며시 욕심이 생겼다.
급하지 않게 천천히 나 나름 이렇게 뭔가를 적어보는 이유다.

요즘 이런저런 글을 쓰면서 내가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혹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마음의 보호막과 방어구와 장신구를 두르고 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글을 쓰면서 그런 걸 떼어놓기로 마음먹었다. 근데 자꾸 더 멋진 뭔가로 갈아입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하다.

언니가 요리사나 가수가 되고 싶다고 열심히 소리치자, 옆에 앉은 4살 동생 하람이도 뭔가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자기도 저 작고 올막졸막한 손을 반짝 들었다. 너무도 당당하게 그리고 맑은 목소리로 자기도 되고 싶은 것을 외친다.


"멍뭉이! 하람이는 멍뭉이!!"

멍멍이 될 거란다.
불현듯 언젠가 작가 모이는 무슨 모임에 갔다가 '곡식을 발효시킨 물을 끓여 증류시킨 이슬'에 흠뻑 취해 새벽에 기어들어온 우리 집 멍뭉이가 떠올랐다.

하람이도 이다음에 훌륭한 미녀 동화작가가 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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