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손과 부부의 역학관계

100개의 글쓰기 31

by 김민성

등이 간지럽다.

안 그래도 유연하지 못한 몸, 살이 찐 후 더 뻣뻣해졌다. 당연히 넓어진 내 등짝의 상당히 많은 부분에 손이 닿지 않는다. 요즘 차가 고장 나서 아침저녁으로 걸어다니고 있다. 주변을 둘러보고 사람이 없으면 약수터 어르신들처럼 앞 뒤로 손뼉 치기를 시도하고 있다. 살이 많이 쪄서 이게 안 되는 상황이다. 심각한 거 맞다.


슬금슬금 벽에 등을 비벼 보지만 간지러움은 전혀 사라지지 않는다. 도리어 이게 풀어지지 않으니 시원함을 향한 갈증만 커진다.


아... 진짜 내가 사과해야 하나?


사실 시작은 말장난이었다. 씨득씨득 말장난하며 아내 놀리다가 화내게 만들었다. 장난으로 시작해서 감정 다툼으로 변했는데 이제는 자존심 싸움이 된 것이다.

이게 그렇다. 이런 거는 나이가 얼마나 많이 먹었느냐와 전혀 상관없는, 오직 남자와 여자의 문제다.


TV에는 아내가 전혀 좋아하지 않는 LOL 게임 방송이 계속 나온다. 분명 아내도 저거 보기 싫을 텐데 리모콘이 내 쪽에 있어서 달란 말 안 하고 저거 계속 보고 앉아있는 거다. 지금 내가 등짝의 간지러움과 자존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처럼, 저 여자는 알지도 못하는 게임 캐릭터의 스킬명을 외치는 해설자의 목소리와 자존심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일 테다.


등이 너무 간지러워 급기야 이마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아내가 눈치챌까 몸을 크게 움찔거릴 수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오른쪽 귀까지 간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아내를 안 보는 척하며 주변을 둘러봤는데 귀이개는 아내가 앉아있는 쪽 책장에 있다.

아 씨. 이건 내가 불리하다. 지금 저거 가져오겠다고 움직이면 여태까지 잘 버티고 있는 자존심 전선이 완전히 무너질 수밖에 없다.


혀를 입천장에 붙이고 미간을 찡그린 상태로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하나, 둘, 셋...

다시 입으로 들이쉴 때보다 천천히 내쉬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선...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 통제하기 위한 이 호흡법은 천축국(인도)의 차크라 수련법의 일종이라고 언젠가 만화책방에서 읽은 양판 무협지에 나와 있었다. 그러니까 아무 효과 없다는 말이다. 그냥 순전히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해봤다.

재앙이다. 귀는 계속 간지러워 먹먹해지고, 등짝에 있는 간지러움 전담 세포는 미친 듯 널뛰기 시작했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


등에 힘을 주고 엉덩이를 아내 쪽으로 들이밀었다. 아내는 신경질적으로 피한다. 지금 여기에서 멈추면 죽도 밥도 안된다. 여기서 더 밀어붙여야 한다. 다시 엉덩이를 쭈욱 밀어 넣고 몸을 꿀렁꿀렁 아내 쪽으로 꿈틀거렸다. 계속 피하던 아내의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야. 뭐하는 짓이냐ㅎ!"


오케이. 됐다. 목소리 끝에 슬쩍 웃음이 묻어 있다. 이거 통했다. 바로 지금이다. 내가 남자다 하는 목소리로 아내에게 단호하게 큰소리쳐야 한다.


"이쁜 지형아! 내가 잘못했다!! 완전 잘못했다!!"


짜악. 바로 등짝에 스메쉬가 날아들었다.


"당연하지 닝겐아. 니가 잘못했지! 그럼 됐고 등 대 긁어줄게."


"어? 어떻게 알았어? 나 등 가려운 거?"


"아조 옆에서 꿈틀꿈틀 지랄발광을 하는데 그걸 모르겠냐? 앙?"


아내는 피식 웃더니 회색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을 세워 등 뒤로 넣었다. 머리 끝이 쭈삣 솟으며 빨리 긁어 달라고 아우성이다.


"자기야. 왼쪽 왼쪽. 거 기서 조금만 위로. 어. 그래 거기, 거기, 거기!!"


아내가 북북 긁적거리자 시원함이 몸 전체로 퍼져나간다. 긴장된 근육과 신경들은 경계를 해제하고 풀어지기 시작했다. 발로 저쪽에 있는 리모콘을 끌고 와서 아내 쪽으로 슬쩍 밀어줬다. 아내는 다시 한번 피식 웃더니 미드 채널을 틀었다.


아내 쪽 책장에 있는 귀이개로 오른쪽 귀를 팠다. 살살 파냈더니 왕건이가 끌려 나왔다. 해냈다는 뿌듯한 성취감과 함께 이걸 해낸 나 자신을 대견해하며 왕건이를 책장 위에 전시해둘까 생각하다 참기로 했다. 아내의 손이 움찔거리는 모양새가 빨리 버리지 않으면 등짝에 불날 것 같다.


"닝겐아. 다음에 어디 가서 효자손이나 하나 사다 놓든가 해라."

아내의 말에 그럴까 하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효자손 = 나무로 된 길고 잡기 편한 막대기 = 최고의 매.


아직까지는 정식으로 매 맞는 낲녕이 되고 싶지는 않다. 우리의 수요일 밤 11시 37분, 잠들기 전은 평화롭다.

당분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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