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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전에 남동생 집에 놀러 갔었다. 8살 효은이, 4살 태연이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효은이는 올해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아장아장 걷는 것을 본 것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학교에 간다니 대견하고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 있는 집은 어디나 그렇듯 생활의 중심은 아이들이 될 수밖에 없다. 집 곳곳에 아이들 사진과 흔적이다. 효은이가 졸업한 관계로 기념할만한 사진이 또 늘었다. 유치원 졸업앨범과 사진이 책장 한 곳에 자리 잡았다.
남동생 말이 효은이는 이 졸업사진이 무척 마음에 들었단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빠, 사진 보여줘요'라고 하고, 자기 전에는 끌어안고 잘 기세라고 했다. 사진 나온 것을 보니 그럴만했다. 눈이 반짝거리고, 참 예쁘게 나왔다.
차린 음식을 먹고, 실없는 농담을 하고, 4살 태연이가 가져온 공룡 그림책을 읽어주고... 느긋하게 저녁을 보냈다.
그러다 지나가는 말로 지형씨가 효은이에게 말을 건넸다.
"효은아. 너 요즘 유치원 안 가지? 큰엄마 집에 놀러 올래? 큰엄마가 떡볶이 만들어 줄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효은이는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네. 언제요?"
그렇게 2월 마지막 목요일에 효은이와 태연이는 큰아빠와 큰엄마 집에 놀러 오기로 했다.
사실을 말하면, 그렇게 말해놓고 나는 잊어버리고 있었다.
지형씨는 기억하고 있었는지 목요일 아침에 제수씨에게 전화해서 아이들 놀러 오라고 했고, 점심 무렵 아이들이 집으로 왔다.
엄마와 빠빠이를 한 아이들은 이내 집안을 기웃거렸다. 지형씨와 둘이 사는 집이라 아이들이 놀만한 것이 없다. 일단은 밖으로 나가 밥을 먹기로 했다. 근처 돈까스 뷔페가 있는데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집이다. 효은이를 두어 번 데려갔었다. 효은이는 거기에서 크림파스타 두 접시와 고르곤졸라 피자 5조각을 순식간에 해치웠고, 기분 좋은 표정으로 오렌지 주스까지 마셨다. 반면에 태연이는 입이 짧은지 뭘 안 먹으려 했다. 스마트폰을 켜서 유튜브 틀어주고, 거기 정신 팔린 틈에 이것저것 입에 넣어주는 것으로 겨우 식사 성공.
주변 어르신들이야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보여주는 철없는 부모'처럼 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상은 저게 있으니 요만큼이라도 수월한 것임에도 말이다.
식사 후 지형씨는 잠시 볼일이 있었던고로, 효은이와 태연이는 나와 함께 근처 키즈카페로 왔다. 카페라기보다는 실내 놀이터라고 봐야지 싶다.
혼이 빠지는 느낌을 간만에 경험했다. 수십 명의 아이들이 구르고, 뛰고, 매달리고, 이리저리 달려 다니는 세상에서 조카 둘을 챙기는 것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 태연이를 보면, 효은이가 사라지고, 효은이를 찾으면 태연이가 안보였다. 그나마 태연이의 관심이 큰 아이들이 노는 곳이 아닌, 플라스틱 야채가 가득한 평화로운 곳이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태연이는 작은 나무 카트에 감자, 옥수수, 파프리카, 당근, 오이, 호박 같은 걸 담아서 내게 몰고 왔다. 그리고 방긋 웃고는 말했다.
"큰압빠. 아아~"
플라스틱 오이 한 입, 플라스틱 옥수수 한 입, 플라스틱 감자 한 입... '아이구 배부르다'했더니 태연이는 세상 만족스러워한다. 그 와중에 효은이는 바닥을 빙글빙글 도는 스티로폼을 뛰어넘고, 실내를 가로지르는 정글짐을 넘나들고, 빙글빙글 미끄럼틀을 타고는 땀이 흠뻑 젖어 왔다.
아이 둘은 이 정신없는 와중에서 잘 놀아 준다. 작은 편백나무 큐브가 들어있는 샌드박스에서 놀기도 하고, 아담한 그네에 서로 타겠다고 8살과 4살이 결투하는 장면도 보여주고(울음과 악다구니를 무기로 삼은 4살 승), 볼풀에 들어가 자신들을 묻어달라고 큰아빠를 언더테이커로 만들기까지...
내 혼은 이미 저 멀리 사라졌지만, 너희가 웃으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지 뭐.
그렇게 한참을 놀다가 효은이가 갑자기 나를 보더니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냥 딱 봐도 장난꾸러기가 뭔가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을 때의 눈빛이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아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름에 좀 멍해졌다. 효은이의 눈은 자기가 큰아빠를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꽤 근사한 장난이라고 생각했는지 초롱초롱하다.
"어? 어... 그러니까... 야. 늬네 아빠는 사무실에 있잖아."
내가 생각해도 참 재미없는 대답을 하고 말았다.
"아빠, 왜 그래. 아빠는 아빠잖아아~ 키히히."
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효은이는 큰아빠를 아빠라 부르기 장난을 계속한다. 한 번도 아빠라 불릴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이미 결혼할 때부터 아이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아내는 종종 아이가 없어도 정말 괜찮으냐 물었고, 나는 별 상관없다고 대답했었다.
주변에서는 가볍게 '아이는 어떻게?'라고 물어본다. 그러면 대답은 '생기면 낳고, 아니면 둘이 살려고요.'라고 대답했었다. 사실 내게 이 말은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니 나는 누군가가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전혀 생각해보지 않고 살았다. 비록 장난이지만 효은이가 '아빠'라고 불렀을 때, 당황해버렸다. 당혹스러운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마 이게 TV 드라마 같으면 '자연스럽게 웃으면서 조카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효은이 큰아빠 딸 할래?라고 대답한다.'정도의 장면이 연출될지 모르겠다. 정작 현실의 나는 어색하고 멍청한 표정으로, 효은이의 장난에 니 아빠는 사무실에 있잖아...라고 대답했을 뿐이다.
효은이는 그렇게 한 10번쯤 나를 '아빠'라고 부르고 크흐흐 웃고를 반복하더니, 이내 양말을 벗어 내게 건네고는 아크릴 벽을 타러 달려갔다. 태연이는 큰아빠 먹으라고 플라스틱 파프리카를 내 손에 쥐어줬다. 그리고 누나 따라서 양말을 벗어 내 옆에 벗어 놓았다. 아이들의 양말을 말아서 패딩 호주머니에 넣었다. 달려 다니는 아이들이 날렵하기가 사바나 초원의 얼룩말 같다.
그러고 보니 나 말고도 주변에 자기 아이들을 데려온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보인다. 신기한 것이 엄마와 아빠의 표정은 그럭저럭인데, 할머니나 할아버지 혹은 이모나 삼촌으로 보이는 경우는 꽤 고단해 보인다. 내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집으로 갈 시간이 되었다. 더 놀자고 보채지나 않을까 걱정했는데, 효은이와 태연이는 두말 않고 '네'대답하더니 따라나선다. 이제야 보니 또 손에 음료수를 하나씩 들고 있는 아이들이 꽤 보인다. 영리하게도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음료수를 입구에서 판매하고 있었던 거다. 효은이도 태연이도 목이 말랐을 텐데, 사달라 소리를 하지 않는다.
"음료수 사줄까?"라고 했더니 누나인 효은이는 괜찮다고 말한다. 4살 태연이야 대뜸 캐릭터 그려진 남의 음료수를 집어 들었지만 말이다.
"태연아. 그거는 다른 친구 거야. 큰아빠가 태연이 거 사 줄테니까 친구 주세요."라고 했더니 금세 말을 알아듣고 음료수 병을 놓는다. 착하다.
괜찮다고 했던 효은이는 젤리 음료수를 태연이는 오렌지 주스를 골랐다. 그리고 착하게 잘 놀아준 것이 고마워서 추가로 장난감이 들어있는 달걀 초콜릿도 하나씩 쥐어줬다. 둘 다 기분 좋아한다. 너희가 좋으면 나도 좋다.
남동생에게는 날마다 일어나는 일이겠지만, 나는 이런 경험이 처음이다. 확실히 책에서 본 것과 현실은 다르다.
무뚝뚝한 남성이 작고 귀여운 아이가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면(실제 혈연관계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얼음 같은 표정이 갈라지면서 변화를 암시하는 뭉클한 장치가 될 장면이겠으나... 막상 내게는 조카의 장난에 난감한 느낌만 가득이었으니 말이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나니 집이 조용하다.
이게 익숙하다.
안도감이 든다.
변한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