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했던 지루한 일상
서울대공원 숲길은 내가 10년 전쯤 심하게 병치레를 한 후 회복기 때 좋은 공기도 마시고 체력 단련도 할 겸 동생과 함께 찾았던 곳이다. 서울대공원에서 코끼리 열차를 타고 동물원에서 하차해 산림욕장길을 걸었다. 쉴 수 있는 의자와 공간이 군데군데 있었지만 청계산 능선이다 보니 오르막과 내리막이 지속됐고 생각보다 힘들었다. 분명히 서울인데 깊은 산속에 들어온 것처럼 숲이 울창했고 인적이 드물어지자 길을 잃을까 두려워 샛길로 뛰어 내려왔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는 치유의 숲으로 향했다. 사전 예약을 하면 편백봉 스트레칭, 폭포 명상, 숲 속 싱잉볼, 태극권 체조 등 각종 산림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한다. 프로그램별로 요일과 시간 제약이 있는데 내가 친구들과 함께 간 토요일 오전에는 운영되지 않았다. 우리는 정작 치유의 숲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치유의 숲으로 가는 길을 산책했다. 이른 아침 약한 비가 조금 내리다 그친 상태라 하늘이 맑고 깨끗할 뿐 아니라 바람도 제법 시원하고 숲의 나무 냄새도 더 많이 나는 것 같았다. 일기 예보의 비 소식 때문인지 사람도 거의 없어서 호젓하게 거닐기 딱 좋았다.
나는 평범한 일상이 간절했던 시간을 간직한 장소에 다시 오니 힘에 겨웠던 순간들이 앨범 속 사진을 보듯 한 장씩 한 장씩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수포성유사천포창이라는 희귀 난치성 자가면역질환으로 3년 넘게 고생했다. 몸속의 항체들이 외부 항원을 공격하는 대신 정상적인 점막과 피부를 공격하면서 전신에 수포를 유발하는 병이다. 자가면역계 이상이 원인이라고 하지만 근본 원인은 분명하지 않아 진단과 치료가 어렵다, 100만 명 중 10명 정도에게 나타나는 희귀 질환으로 방치하면 치사율이 80%에 이른다고 한다. 질병관리청에서 희귀 질환으로 관리하고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도 산정특례자로 분류되어 본인 부담 치료비를 대폭 줄여준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장애인 등록도 가능한 중증 질환이다.
처음에 두드러기가 시작되어 동네 내과 병원을 갔다. 가려움과 두드러기가 빈번한 것이 의심스러워 큰 병원에서 진료를 받도록 의뢰서를 써달라고 요청했다. 의사는 계절성 알레르기이고 알아서 치료해 줄텐데 무슨 병일까 봐 걱정이냐고 건강 염려증 환자 취급을 했다.
얼마 후 엄지발가락 위쪽에 수포가 생겼는데 낫질 않아서 동네 피부과에 갔다. 물집을 제거해도 다시 물이 차올랐다. 점점 심해지니 나더러 요양 시설 같은 데서 일을 하냐고 물었다. 어디선가 옴이 옮았을 수도 있다는 설명이었다. 요양 시설에서 일하지도 않고 전염병 감염이 예상되는 단체 생활도 하지 않았지만 의사 처방대로 몸도 소독하고 집으로 방역팀까지 불렀다.
내 입장에서 두 의사는 치명적으로 잘못된 진단을 한 돌팔이나 다름없기에 우리 가족은 해당 병원에 다시는 발걸음을 하지 않는다. 우리 동네에서 아직도 진료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아할 뿐이다.
병원을 전전하는 중에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진료의뢰서를 받아 들고 집에서 가까운 빅 5 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진료 예약일이 되기도 전에 외출이 어려울 정도로 피부가 붓고 수포가 늘어나자 겁이 덜컥 났고 응급실행을 택했다. 피를 철철 흘리거나 심폐소생술이 필요한 상태는 아니었으니 3~4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겨우 만난 응급실 의사는 피부와 입안 점막에도 문제가 있는 나를 어느 진료과로 보내야 할지 난감해했다. 피부과, 내과, 이비인후과, 치과 얘기까지 나왔다. 기가 막혔다. 결국 피부과에서 가장 빠른 진료가 가능한 의사에게 보내졌다. 추정되는 질환이 있는데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니니 다른 의사에게 진료를 받는 것이 좋겠다는 얘기만 듣고 나왔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다시 빠른 진료가 가능한 다른 의사에게 갔는데 조직 검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인턴 선생이 병변 부위의 피부 조직을 떼어내는데 꼬챙이로 살을 파내듯이 아파서 마취를 하지 않은 건지 물었다. 손바닥은 신체 중 가장 예민한 부분이라 마취를 해도 아프다는 설명을 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병명을 알게 되었다.
원래 예약했던 의사 선생님은 한참 후에야 만났고 그때부터 지옥이 시작되었다. 이 병은 60~80세 노인 환자들에게 주로 발생하고 병변도 신체 일부에만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나는 젊은 나이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증세가 너무 심했다. 하던 일도 중단한 채 입원과 통원이 일과의 전부가 되었다. 보험 처리를 위해 기록해 놓은 이력을 보니 집중 치료가 필요했던 600여 일 동안 외래 진료를 60번 받고 입원을 2개월 가까이했다. 닷새에 하루는 병원에서 살았던 셈이다.
가려움이 인내의 한계를 넘어 긁기라도 하면 바로 수포가 생겼다. 수포가 터져 피부가 벗겨지면 감염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매일 수백 개의 물집을 주사 바늘로 빼내고 해당 부위를 면봉으로 소독했다. 자가면역 반응으로 저절로 생긴 상처 때문에 샤워를 할 때도 고통스러웠다. 위생이 중요하고 진물도 흐르니 안 씻을 수 없었고 진통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았다.
의사로부터 전신 화상에 준하는 처치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피부 상태는 심각했고 목 안쪽에도 물집이 생겼는지 이물감이 느껴져 이비인후과 검사까지 받아야 했다. 수포가 생기기 전에도 딱지가 생겼을 때도 가려움이 극심하고 정신이 너무 또렷해서 전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의식이 없기를 바랄 만큼 괴로워하자 정신과 협진까지 이루어졌으나 처방받은 수면제를 먹어도 잠들지 못했다. 면역억제제를 복용할 때는 면역력이 저하된 상태가 되므로 병실에 커튼을 치고 사람들 출입까지 제한해야 했다.
우리 가족은 모두 나의 치료에 매달렸다. 동생은 통원 때마다 빠짐없이 동행해 주었고 해외에 거주 중인 언니도 나의 병간호를 위해 일시 귀국했다. 어머니는 병 치유 기도를 받도록 지인들께 부탁하셨고 잠 못 드는 다 큰 딸의 등을 아기 재우듯 쓸어주셨는데 온기 때문인지 편안함 때문인지 나는 그때만 잠깐잠깐 졸곤 했다. 병에 시달리다 지친 나에게는 유일한 휴식 시간이었다.
병이 길어지자 나는 약을 먹어도 증세 완화만 가능할 뿐 뾰족한 치료제가 없음을 눈치채고 좌절했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호전과 악화를 평생 반복할지 모른다는 걸 알고 막막했다. 고혈압, 당뇨, 골다공증 등 부작용까지 대단한 스테로이드를 대량으로 장기간 복용하며 두려웠다. 의사로부터 ‘당신에게 남은 날은 OO일 입니다’라는 사형 선고를 받진 않았지만 차라리 세상을 뜨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딸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는지 어머니가 나서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스테로이드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치료하는 의사 선생님을 찾아내셨다. 나는 수백 장의 진료 기록을 복사해서 명성 높은 선생님이 계신 또 다른 빅 5 병원으로 옮겨 갔다.
추가로 혈액 검사를 받았다. 정상적인 사람들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자가항체가 내게는 8%나 있다고 했다. 이를 제거하기 위해 '리툭시맙'이라는 약제를 사용하는데 효과가 없는 사람도 있고 주사 치료 중 쇼크가 올 수도 있으며 비용도 고가라고 설명해 주셨다.
레지던트 선생님이 노트 패드를 내밀었는데 사고가 나도 괜찮다는 동의서였다. 나는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못할 게 없었으므로 즉시 전자 서명을 마쳤고 입원하여 밤새 주사제를 맞았다. 이후에도 계속 통원 치료를 받았고 완치되지 않아 1년 후에 다시 동일한 주사제 치료를 받았다.
이제 끝인 줄 알았는데 퇴원하는 날 간호사가 의사 처방약이라며 또 스테로이드를 주는 것이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죽을 때까지 관리해야 하는 병이라 치료를 끝내는 게 아니라 조절하는 것이라고 했다. 며칠 후 의사 진료 시 약을 끊겠다고 했더니 가려워서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이 정도의 가려움은 예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고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이 더 무서웠다. 간헐적으로 가려울 때가 있었으나 염증을 가라앉힌다는 원적외선 주열기를 이용해 이 시기를 잘 견뎠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후유증을 앓았다.
지금은 많이 흐려졌지만 피부에 흉터도 남았다. 약 부작용으로 손톱과 발톱 20개가 자라는 속도에 따라 2~3번 빠졌고 골다공증 치료도 받아야 했다. 정신적 트라우마도 생겼다. 동그라미나 물방울이 모여있는 그림을 보면 물집이 생각나 소름이 돋는다. 몇 년 전 회사에서 데이터 분석 관련 교육을 받았는데 다수의 데이터를 빨간색, 파란색 동그란 점으로 표시한 통계 그래프를 보는 순간 갑자기 소름이 끼쳐 멈칫했다. 지금도 나는 지나가는 여자의 원피스에 땡땡이 무늬가 보이면 눈길을 돌린다.
여기에 적지 못한 더 많은 사연들을 뒤로하고 결국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돌이켜보면 참 이상하다. 죽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내가 이러다 죽겠구나'라는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았다. 큰 병을 얻은 이들이 처음에 갖게 된다는 감정, “왜 내가?”, “특별히 잘못한 거 없는데?” 같은 분노도 없었다. 병원을 드나들 때마다 나의 이상한 모습을 쳐다보는 눈길도 느끼지 못했다. 사람들이 신기한 듯 봤다는 건 가족이 얘기해 줘서 알게 되었다. 본능적으로 삶에 대한 의지가 작동한 탓인지 나는 오로지 치료에만 집중했다.
이 일로 나는 별일 없어서 지루했던 일상이 커다란 행운임을 느끼며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대가 없이 나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가족이 소중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인생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고통은 축복일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삶에서 중요한 건 지금, 여기 임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