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지난주부터 약속된 유치원 선생님과 상담이 있는 날. 전반기에 아이 적응이나 생활에 대한 상담을 하는 정기행사인 듯한데, 코로나 시국이지만 시간 텀을 두고 마스크를 쓰고 진행해서 늘 통화만 하던 선생님 얼굴도 볼 겸 직접 방문하기로 했다.
둘째는 할머니에게 맡기고, 첫째는 늘 놀이터에서 같이 노는 어린이집 시절 단짝 엄마에게 부탁해놓곤 유치원으로 갔다.
선생님 상담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바로
"손댈 데가 하나 없는 아이"
라고 했다.
아이는 유치원에서 맡은 일도 척척 잘 챙겨서 하고, 친구들과도 두루두루 참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특히 여자아이지만 소꿉놀이, 역할놀이 보단 뛰고 잡고 이런 과격한 놀이를 좋아하는 성향에 남자 비율이 높은 반이라 그런지 남자아이들과 엄청 잘 논다는데 학기 시작하고 꽤 많은 남자아이 엄마들이
"새로 온 친구 다현이 가 누구예요? 그 아이 이야길 집에서 많이 해요."라는 전화를 선생님이 꽤 많이 받았다고 했다.
어린이집에서부터 남자아이들과만 친해서 걱정이라 그런 부분도 물어보니 전혀 걱정할 것 없다고 노는 성향이 좀 다를 뿐 두루두루 잘 사귀고 논다고 했다.
아이는 호기심이 많아 질문도 많고, 교무실에 가서나 담임 선생님에게나 똑 부러지게 말을 잘한다고 한다. 수업 시간에 집중도도 높고 선생님 말도 주의 깊게 들어서 선생님이 까먹고 지나가는 부분이 있으면 그거 해야 돼요 이렇게 이야기까지 해주는 아주 모범생 스타일이란다. 어린이집 바뀐 선생님한테도 들은 적 있는데, 나중에 학교 가서 직책을 맡도록 하면 아주 잘할 거라는 이야길 유치원 선생님에게도 들었다.
아이는 처음 배우는 한자도 전에 배웠던 아이들보다 훨씬 잘하고 열심히 하며 생활 습관도 잘 잡혀 있단다. 한마디로 손댈 데가 없는 아이란다.
나는 집에서 떼쓰는 모습을 심각하게 바라보는 엄마로서 믿기지 않는 이야기고, 선생님은 모범생인 아이가 집에서 떼쓰는 게 믿기지 않는 상황이다. 한 아이를 두고 우리는 동상이몽이란 말이다.
나는 선생님 이야길 들으며 연신 감탄을 했다. 어쩜 그렇게 집과는 다른지, 차이가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하다가 선생님의 뼈 때리는 말이 내 귀에 꽂혔다.
"다현이는 너무 잘하니까 스스로도 정말 잘하고 있다고 그렇게 더 믿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다현이는 칭찬을 먹고사는 아이고, 그렇게 인정해주면 정말 누구보다 더 잘하고 빛날 수 아이예요. 어머니"
선생님은 진심을 다해 내게 말해주었다. 같은 7세고 유치원에 다녔어도 일과나 규칙, 규율 지키는 게 힘든 아이가 너무 많은데 다현이는 정말 잘하고 있고 잘하기 위해 참는 게 아니라 자기표현도 확실하게 하는 아이라고.
그 이야길 들으며 나는 이 아이가 너무 힘들어서 너는 대체 왜 이럴까 고민하며 울고 카페로 도피하듯 혼자 뛰쳐나온 게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같은 아이를 말하는 게 과연 맞는걸까? 의문이 들만큼.
선생님한테 엄마 입장은 항상 지시해야 하는 입장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변명하듯 늘어놓았지만 그 말은 내귀에 떨어지지 않게 딱 박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그래. 아이는 어쩌면 단순히 믿어주길 바랬던 것은 아니었을까? 너 이 시간에 이거 해야 돼. 그만 봐야 돼. 이런 강압적인 지적 대신 지금 이 시간이니까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 할 수 있겠어? 네가 잘할 걸 믿어. 할 수 있을 거야.라는 긍정적이고 신뢰가 깃든 말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이는 유치원에서는 인정받는 모범생, 집에서는 떼쓰는 천덕꾸러기라는 괴리감 때문에 얼마나 힘겨워했을까 맘이 짠해졌다. 어릴 시절 나처럼 "나는 친해지면 별로인 사람일까?"라는 물음을 가지진 않았을까 마음이 아렸다.
그럼 생각이 드니 나는 또 무작정 좀 더 칭찬해주고, 인정해주지 못한 게 미안해졌고, 죄책감이 들었다.
선생님과 상담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희한하게도 길가에서 엄마와 실랑이 벌이는 아이를 두 번이나 목격했다.
한 아이는 남매에 오빠로 보이는 아이가 우유인가 아이스크림을 쏟은 듯 보였고, 엄마는 거친 손길로 바닥을 닦으면서 아이에게 화난 감정을 쏟아내는 게 보였다. 엄마는 무언가 잘못을 지적했고, 5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시무룩한 채 미끄럼틀에 앉아 있었다.
두 번째는 세 아이의 엄마였다. 첫째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엄마에게 무언가 요구를 했고, 엄마 표정은 좋지 않았다. 얼마 전의 나처럼 또 시작이다 딱 이런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얼마 터울 나지 않는 여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마냥 기다리고 서 있었으며, 막내인 아이는 유모차에 타고 있었다. 엄마는 무언가 떼쓰는 아이에게 설득했지만 잘 되지 않았고 그렇게 보도블록에 서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어쩜 그리 절묘하게 그들을 본 것인지, 거기가 젊은 엄마들이 많이 사는 아파트라서 그런가 보다 싶었다.
엄마들은 저렇게 감정이 상한 채로 아이와 실랑이하고는 밤이 되면 후회하겠지. 그러곤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얘는 대체 왜 이래? 하며 질려할 것이다. 얼마 전의 나처럼 말이다.
나는 그들의 심정이 1000퍼센트 이해가 갔다. 엄마 하나에 아이 둘, 아이 셋. 엄마는 분명 한 명인데 실랑이를 벌이는 아이와는 감정적 마찰을, 한 아이에게는 무관심이라는 마찰을 줄 수밖에 없음을 보며 아 엄마도 어쩔 수 없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엄마 혼자 아이 둘셋을 케어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는 말 안 해도 경험한 자는 다 알 것이다. 엄마 몸둥이는 하나인데 둘, 셋인 아이 모두에게 백 프로 다 만족을 준다는 것 자체가 허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니 나의 죄책감도 조금 완화되기 시작했다.
그래. 완벽한 엄마는 없다. 노력하는 엄마만 있을 뿐.
혼자 끙끙대며 아이를 붙들고 씨름하는 것보단 공동육아 건 어린이집 선생님이건, 문화센터이건, 할머니 할아버지건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 엄마의 손길 닿지 않는 부분에 테트리스 하듯 딱딱 아이들의 정서를 채워주는 게 더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첫째를 키울 때 고집스럽게 고생스럽게 애를 혼자 키우며 자긍심을 갖는 것보단 지금 둘째를 키울 때처럼 맘 맞는 엄마들을 만나 같이 놀리고, 할머니에게 하루 부탁을 하는 등 조금은 손 내밀 줄 아는 것도 필요하다 생각했다.
어쨌든 유치원 상담으로 돌아가서 나는 오는 내내 읊조렸다
"그래. 네 문제 아니야. 엄마만 잘하면 돼."
올라오면서 요구르트 6줄과 초코파이 대형 박스를 사 놀이터 아이들에게 다 나누어 주며 첫째 아이에게 말했다.
"너는 엄마 지적 안 해도 잘하는 아이니까 엄마가 믿을게."
아이는 뿌듯해했고, 저녁에 씻는 거며 밥 먹는 거 게임하는 것 까지 아이를 믿고 스스로 하게 하자 시간을 잘 지키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하루 만에 드라마틱하게 달라지지 않겠지만 나는 다짐했다.
아이가 스스로 잘할 수 있음을 믿어주기!
그게 매일매일의 또 다른 목표가 되었고 우리 사이의 깊은 골을 풀어낼 해답인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