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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떤 종양인가요

허무 속 수용 : 김훈, 강산무진을 읽고

by 유재우
숨이 끝나는 순간, 아내의 몸속에 통증이 있었다 해도 이미 기진한 아내가 아픔을 느낄 수 없었고 아픔에 반응할 수 없었다면 아내의 마지막이 편안했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가 두통 발작으로 시트를 차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때도, 나는 아내의 고통을 알 수 없었다. 나는 다만 아내의 고통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고통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밤새 뒤채는 아내의 병실 밖으로 겨울의 날들과 봄의 날들은 훤히 밝아왔고 병실을 지키는 날 아침에 나는 병원에서 회사로 출근했다. 뇌종양이 '생명현상'의 일부라고 강조하던 주치의에게 아내의 고통과 나의 고통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묻는다면, 그는 뻔하고도 명석한 답변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었다.

─ 생명현상은 그 개별적 생명체 내부의 현상이다. 생명은 뒤섞이지 않는다. 생명에서 생명으로 건너갈 수 없고, 이 건너갈 수 없음은 생명현상이다.
라고.

- p46, 화장(火葬) 중에서


공감과 이해와 존중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다. 사람은 정말 다른 사람에게 공감(共感), 즉 '함께 느낄 수 있는' 존재일까? 내가 엄연히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어 있고, 다른 사람 역시 내가 아니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런 점에서 무언가를 함께 느낀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설령 가능하다 할 지라도, 그 모습은 비정형하기에 함부로 비교할 수 없으며, 그런 점에서 다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우리는 어떤 하나의 대상을 보면서도 여러 가지의 감정이 교차하는 것을 느낀다. 그것이 긍정과 부정과 같은 대립적인 감정인데도 말이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보면 어떤 사람을 이해한다, 공감한다, 존중한다라는 표현은 사실 '내 입장에서 너의 상황 또는 감정을 나름대로 잘 생각해보려고 노력한다' 정도가 맞을 것이다.


실제 사전적 정의도 그렇다. 공감은 사실 함께 느낀다는 뜻이 아니라 '타인의 사고나 감정을 자기의 내부로 옮겨 넣어 타인의 체험과 동질의 심리적 과정을 만드는 일'이며, 이해는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것', 존중은 '높이어 귀중하게 대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 정의의 공통점은 결국 공감, 이해, 존중 모두 어떤 외부의 것(다른 사람의 말, 행동 등)을 내 마음속에서 나름대로 재구성한 감정 또는 태도일 뿐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는 100%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했음에도 '이해한다, 공감한다'라고 말하고, 사실 무관심한데도 '존중한다'라고 표현한다. 특히 요즘 같은 다원화/개인화 사회에서 '존중'이란 정말 위험한 단어가 될 수 있다. 여러 소수자 문제를 두고 단순 회피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대표적인데, 정말 높고 귀중하게 생각했다면, 평소 그렇게 행동하고 말하지 않았을 것을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래서 존중은 간혹 '외면'과 동일한 단어로 사용된다. 만약 이를 깨닫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남은 것은 결국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과 감정일 뿐이고, 사람이란 그런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는 존재란 사실에 몸서리치게 될 것이다.


한 가지 절망적인 상황을 더 덧붙이자면, 사람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육체든 정신이든 동일하다. 10년 전 찍은 사진 속에서 발견한 나의 모습이 낯설고, 어릴 적 썼던 일기가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재밌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여기에 온갖 육체적 욕구와 본능, 습성, 성격 같은 것들이 버무려져서 흔히 정신 또는 이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 심지어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일기를 쓰는 사람이라면, 또는 잊지 못할 잘못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수년 또는 수십 년 전의 나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보자. 만약 이해가 된다면 그것이 혹시 합리 또는 외면, 혹은 오류가 아닌지 의심해보자. 그 당시 나는 왜 그랬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으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그것이 지금의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나는, 그리고 우리는, 했다.


이러한 관점은 세상과 자아를 매우 차갑고 비관용적으로 보는 태도이며, 그래서 때로는 비도덕적으로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진리’라고 말하는 문장이 바로 위 인용문 ‘아내가 두통 발작으로 시트를 차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때도, 나는 아내의 고통을 알 수 없었다. 나는 다만 아내의 고통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고통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이다. 김훈은 이러한 관점을 요도염으로 오줌을 혼자 누지 못하고 부하 여직원 추은주를 성적으로 몰래 연모하는 ‘오상무’를 통해 드러낸다. 그렇게 오상무라는 화자의 입장에서, 한때 사랑했을 것이고 어쩌면 지금도 사랑하고 있을지 모르는–이 역시 관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아내의 고통을 철저히 객관화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객관화란 일반적인 사전적 정의와 달리 오직 나(오상무)의 주관적인 고통에만 집중함으로써 나와 그녀(아내)의 세계를 철저히 분리시키는 과정이다. 이는 곧 세계의 진실을 마주하고, 제3의 눈으로 공허를 바라보는 순간이기도 하다.


배웅/화장/항로표지/뼈/고향의 그림자/언니의 폐경/머나먼 속세/강산무진이라는 8개의 단편 소설로 구성된 이 책의 핵심은 바로 이렇게 철저히 객관화된 묘사에 있다. 앞서 말했듯 이는 흔한 소설의 관찰자 시점과는 다르다. 강산무진의 객관화는 일명 문장의 관찰 또는 제3의 주관적 관찰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철저히 주관적인 화자를 통해 관찰을 진행하면서도 기묘하게 관찰 대상과 화자의 세계가 분리된 것 같은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 그래서 김훈의 소설은 이야기 속 화자가 아닌 김훈이라는 작가가 직접 그렇게 느낀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심지어 그를 일종의 ‘변태’(나쁜 의미가 아니라 어느 하나에 몰두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강산무진은 그런 묘사에 강박적이고 집착적인 부분이 많다.


실제로 주변에서 강산무진을 읽다가 묘사가 너무 과도하다는 이유로 읽기를 포기한 사례를 봤다. 그런 것이 김훈이 추구하는 묘사의 장점이자 단점일 것인데, 이번 강산무진의 8개 단편에서도 적나라하게 나오는 성적 묘사와 분뇨 묘사가 대표적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불쾌감 또는 '냉소적 희열'은 평소에 우리가 다양한 이유로 외면하고 있는 부분을 억지로 보여줌으로써 나오는 감정이다. 그렇게 주관적인지 객관적인지도 헷갈릴 듯한 묘사가, 독자로 하여금 강렬하고 공통적인 통증(이것이야말로 일종의 공감이라고 할 수 있을까)을 느끼게 한다는 점은 아주 흥미롭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를 평소 우리가 외면하고자 하는 세계의 진실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소설이라는 예술 매체로 포장한 악랄한 행위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하나다. 바로 김훈의 소설이 아주 악랄해서 재미있다는 사실이다.


강산무진의 또 다른 특징은 이렇게 인간 군상의 모든 것을 스스럼없이 보여주면서도, 그에 대해 어떠한 가치 판단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선과 악이 유치하다고 여겨지는 요즘 세상에서 이러한 형식은 현대 문학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선과 악의 탈피, 절대적인 것의 해체라는 점에서 일종의 허무주의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런 허무함은 앞서 말했던 기묘한 묘사들로 인해 더욱 증폭된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강산무진을 읽으며 허무주의와 쉽게 혼동되는 비관 또는 염세를 느꼈다. 소설 속에 그런 감정이 매우 깊은 곳에 숨겨져 있어 잘 드러나지 않는 것 같았다. 사실 강산무진의 문장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소설 전반에 깔려있는 허무하고 냉소적인 객관화는 도리어 인물들이 ‘즐겁게 받아들이면서’(한 장면에 들어가는 엄청난 묘사들을 보면 가히 기괴할 정도로 즐겁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극복된다. 그것이 김훈의 소설 속 화자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며, 적어도 이 소설은 그것이 사람들이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그것이 극대화된 표현이 바로 위 인용문에서 나온 ‘생명 현상’이다.


생명현상은 그 개별적 생명체 내부의 현상이다. 생명은 뒤섞이지 않는다. 생명에서 생명으로 건너갈 수 없고, 이 건너갈 수 없음은 생명현상이다. 뇌종양 역시 생명현상이다. 그런 뇌종양과 함께 살아가는 오상무의 아내는 맛있는 밥에서 도리어 구린내가 난다 생각하고, 제 똥 냄새에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로 넘어간 것이다. 그런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우리가 종양이라고 느끼는 것도 사실은 생명일 수 있다는 발상이 얼마나 발칙한가. 이러한 발상은, 생명을 가진 나 자체가 어떤 세계에서는 종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생명으로 생명을 죽이는 존재. 이러한 생명 간의 교류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것이 강산무진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이며, 이를 좋게 말하면 현대 사회의 무(無)를 제시하는 다차원적 방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극단적 객관화로 인한 자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또 누군가는 이러한 소설의 관점을 단순한 비도덕 또는 잘못된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글의 서두에서 말했듯, 그리고 강산무진이 그러하듯, 생명 간의 '교류'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며,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감정은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무엇도 함부로 말할 수 없으며, 어떠한 가치 판단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그리고 강산무진의 인물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벌어지는 일을 겪으며 살아가는 것뿐이다. 적어도 현대 사회의 관점과 이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믿는 진리는 그러하며, 동시에 우리는 그런 진리를 부분적으로 무시하며 살아간다. 강산무진은 그렇게 미친 현대의 아이러니를 적나라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왜 함께 살아야 하는지를 대답할 수 없었으므로
왜 헤어져야 하는지를 물을 수가 없었다.
- p.246, 언니의 폐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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