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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업 Oct 07. 2024

부부상담 과제하다 엄마를 다시 보다.

사랑 속에 숨겨진 것을 그간 보지 못했다.


부부상담 과제로 받은 종이 한 장.


각자 부모님에 대한 기억을 꺼내야 하는 질문들로 가득했다.

(언제 다 한다냥...)



하나씩 답을 하다가 질문 하나를 두고 고민이 시작 됐다.



"엄마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단어 하나는?"



그동안 엄마랑은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주고받고,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나의 스승처럼


삶에 필요한 이야기들을 많이 해왔다.



그런 엄마를 한 단어로 표현하라니...


오히려 머릿속이 하얘졌다.






고민에 잠긴 나에게 떠오른 단어 하나.


"희생"


(현명함과 희생 두 가지인데)


(내 삶의 터널을 걷고 있는 시기라 희생이 먼저 떠올랐다.)







학창 시절에도, 취업 후에도 엄마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을 때, 사람들은 같이 말했다.


"어머님 정말 멋지시다."


"너희 엄마 진짜 현명하시다!"


"그 정도면 마더테레사 아니야?"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방글라데시에서 온 친구가 경제적 어려움과 향수병으로


자살기도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방학 때 그 친구가 잘못된 길을 선택할까 두렵다는 내 말에


엄마는 아빠와 함께 4시간 넘는 길을 달려와


친구의 기숙사 짐을 다 우리 집으로 가져와서


음식도 해주고, 손수 이불빨래도 해주셨다.


(정작 나 데리러는 안 오시는 분들 ^-^)


(친구야 덕분에 차 얻어 탔다.)

(응?! ㅋ)



결국 그 친구는 무탈하게 대학을 졸업했다.



(돌이켜보니 내 아이의 친구 한 명을 방학 때 케어한다?)

(너무 힘든 일인 것 같다.)

(난 미리 포기 ㅋ)







그랬다.


친정 엄마는 자기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한 삶을 택하셨다.


그렇다고 마더테레사처럼


거창한 구호사업이나 사회봉사를 하신 건 아니다.


그저 엄마는 자 위에서 남을 배려하셨다.


말이 좋아 배려였지, 돌이켜 생각하니 "희생"이었다.






사실 마더테레사 수식어가 등장 한 때는,


나의 친조부모님(엄마의 시부모님)


모두가 치매에 걸리셨고,


요양원은 못 보낸다고 말만 하는 자식들을 대신해


엄마가 할머니의 대소변 기저귀를 치우고,


밥을 차려드리며 매일같이 시부모님을 돌보셨다.


(본인 집에 오면 손주들도 돌보셨다.)


(일 복 터지는 소리 뽜지직!)







엄마는 내가 어린 시절에도


집에서 1시간 넘게 걸리는 할머니 댁에


매주 가서 농사일을 도와드리고, 음식까지 차리셨다.




게다가 엄마는 종갓집 맏며느리였다.


명절이 되면 시골 할머니 댁에는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셨다.



제사 음식과 손님 상을 차리는 것은 엄마의 몫이었다.

(내가 대학생이 되어서야 제사를 없앴다.)



심지어 하나뿐인 동서는 멀리서 왔다는 이유로,


음식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옆에서 물개박수치는 연기 몇 번을 하고 나면


피곤하다며 잠을 자러 방으로 들어갔다.

(초등학생인 내 눈에도 게으름병 말기 환자)

(후비적)



나는 지금껏 엄마가 할머니댁에서 누워있는 걸 본 적이 없다.

(사실 앉아있는 기억도 거의 없음 주의 ^_^)

(이쯤 되니 아....빠??!!)

(뭐 하시는...?!)



명절이 나고 엄마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나만 희생하면 식구 모두가 편하니까..."라고


이야기하셨다.








또 다른 일화가 있다.


내가 결혼하기 전, 엄마에게 며느리가 생겼다.




엄마가 나와  호적메이트를 불러 얘기했다.


"우리가 평소에 하던 대화가 우리는 당연하지만,


며느리 입장에선 그렇지 않은 게 많다."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생각해서 야 한다."


"며느리한테 다 맞춰줘도 불편할 수 있는 게 시댁이."



이런 생각을 가진 엄마는


며느리의 임신과 함께 삼시세끼 끼니를 챙겨주셨다.


(이마저도 며느리 의견을 물어 챙겨주셨고,


며느리가 먹고 싶다는 메뉴 뚝딱 차려주셨다.)




언젠가 내가 타지 생활을 하다 집에 갔을 때,


며느리 챙기는 게 힘들지 않냐는 나의 질문에


"너랑 나이차이도 별로 안 나 네 생각이 나기도 하고,


이제 막 결혼만 했지 음식도 서툴고 그럴게 눈에 선하니깐.


임신 중에 겪은 일은 평생 기억으로 남더라고."

얘기하셨다.

(눈에 고인 눈물은 덤)


(맞아... 임신 때 기억...평생 남더라... ㅋㅋ)

(후)



"너도 나중에 결혼하면 복 받을 거야 걱정 마~"

(그랬구나아...)

(내가 걱정을 너무 안했나보다아...)

(내 복 누가 중간에서 훔쳐갔노!!!!)

(쿨럭)



아직도 그 시절,


새언니가 눈물짓던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나와는 다른 눈물 ㅋ)

(부럽)







그런 배려와 희생 말고도, 엄마는 현명하셨다.




어린 시절에도 엄마는 우리를 혼낸 기억이 딱히 없다.


분명 필요한 훈육은 하셨는데,


화를 내거나 매를 든 기억이 딱히 없다.

 



내 호적메이트가 중학생 시절,


친구들과 오토바이를 탈에서 밀어서


오토바이가 일부 파손 되었을 때도,


아저씨 미러 조금 깨져서 괜찮다고 하셨지만,


엄마는 아저씨 연락처를 받아 집 찾아가셨다.


선물까지 사서 아들과 함께 아저씨 집에 가서는


아들 보는 앞에서 아저씨 앞에 무릎을 꿇으셨다.

(참 교육의 달인)

(아들 당황)

(ㅋ)



엄마는 본인이 가진 현명한 재능(?) 덕에


 화를 낼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참 교육 뒤엔 우리의 깊은 깨달음이 따라왔으니.

(히힛)







그동안 나는 그런 엄마를 보며 내 롤모델 삼았었다.


엄마의 모든 부분이 닮고 싶었고, 따라 하고 싶었다.




내 결혼라이프 초반의 시댁의 질주에도,


어쩌면 엄마의 삶을 보며 나도 어쩌면


나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시댁의 횡포에도 엄마는 늘 공손하라 하셨고,


공손함 끝에는 네가 빛날 수 있다고 말해주셨다.

(언제쯤...?!)


조선시대급 유머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엄마의 현명한 선택은 늘 옳았기에


그 말을 따랐다.

(하지만 이번엔 남는 게 없었다.)


(우리 시댁은 남달랐으니까.)







상담 과제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


나의 삶은 엄마의 삶과는 다르게 가야 한다는 것을.


한 사람의 희생은 다른 사람을 편하게 해 줄 수는 있지만,


그 속에 정작 "나"는 없다는 것을.



그 희생 안에 정작 "나"의 편함과 안일은 없다는 것을.


(순수히 과제를 하다 스스로 깨달았다.)


(이게 바로 하브루타 학습 방법인가.)


(질문만 봤는데 스스로 깨달음 ㅋ)




결혼 전에 평면으로 보이던 엄마가


결혼 후엔 같은 여자로, 같이 인생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점차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깊은 고민과 함께 한 과제를 들고


상담센터에 다시 찾아갔다.


상담을 하며, 우리 부부의 관계를 진전시켜 줄


삶의 중요한 기술을 한 가지 습득하게 된다.

(오 !!)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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