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7일/ 쇠하지 않는 광채

# 결국 사랑이다.

by 글탐가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7)
환난, 고난, 압박은 우리가 싸워야 하는 것들이 아니라 우리 안에 엄청난 기쁨을 주는 요소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그 환난을 통과하며 승리자가 됩니다. 성도는 환난 없이는 주님의 희락을 알 수 없습니다. 환난 때문에 주님의 희락을 이해합니다. 이에 바울은 "나는 모든 연약함 가운데 기뻐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고후 7:14)

쇠하지 않는 광채는 잠깐 있다 사라지는 유한한 것으로부터 나올 수 없습니다. 오직 변함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인생의 그 어떠한 경험도, 무섭든 단조롭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무기력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365 묵상집 중에서 발췌-

환난, 고난, 압박이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 안에 엄청난 기쁨을 준다?

이 말이 이해되는가?

한참을 고민 끝에 이 글을 이어나간다.


어떻게 환난, 고난, 압박이 우리에게 기쁨을 줄 수 있을까?

이것은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야 할 거 같다.

결과를 아는 싸움!

승리가 확정된 싸움이기에 기쁨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승리한다.

그것은 따놓은 당상이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에게 닥친 환난이나 고난이나 압박이 결국 승리를 위한 과정이기에

그 과정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결과를 모르는 싸움 앞에서 우리는 즐거울 수 없다.

오히려 질 것 같은 두려움과 긴장감과 불안함이 엄습해서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울 것이다.

특히 만약 그것이 생사를 건 전쟁이라면 말도 못 할 두려움에 휩싸일 것이다.

그런데 그 생사를 건 전쟁에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결과를 이미 알고 있다면,

그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한번 상상해보자!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에서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을 물리친 전쟁이라는 것을 알고 그 전쟁에 참여했다고 상상해보자. 만약 그 전쟁의 결과를 모르고 참여했다면 13척의 배로 어찌 133척의 왜군을 물리친단 말인가? 이건 백전백패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전쟁이다.라고 우리는 패배를 예감하며 두려움에 휩싸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승리를 알고 있는 우리가 그 전쟁에 참여한다면, 우리는 웃을 것이다.

'우와~ 이 역사적인 전쟁에 내가 직접 참여하다니! 경이롭다.'

옆에서 포탄이 터지고, 화살촉이 날아들 때 잠시 움찔하며 놀랄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두려움에 휩싸이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전쟁터이다.

이 세상의 전쟁터에서의 싸움은 결국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걸려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선택하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으로 영원히 죽는 것을 선택하느냐

영생(천국)과 영사(지옥)의 기로에 서 있는 전쟁터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취득한 자들이다.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 역시 시공간을 초월한 이천 년 전 십자가 사건이 우리의 인생에

개입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사랑이다.

그 사랑으로 우린 이미 승리자가 됐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자, 이제 믿는 자들에게는 결과를 아는 전쟁터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아직 우리의 삶에 환난이나 고난이나 압박이 있어도 우리는 이 전쟁을 즐겨야 한다.

이미 역사적으로 확정된 승리로 인쳐진 전쟁이기 때문이다.


이 승리의 공급원은 결국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이다.

십자가 사랑의 그 은혜가 시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앞으로 지을 우리의 모든 죄까지도 사했기에

우리는 죄에서 자유하고 승리를 확신하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들이 된 것이다.


다시 한번 넉넉히 승리하게 하시는 그 사랑을 묵상함에 감사드리는 한 날이 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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