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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탐가 Sep 13. 2022

오늘은 혹독한 날!

# 아스팔트 위에서 만난 지렁이 시각

요즘 살이 부쩍 올라 운동이 필요해서 가볍게 산책을 나왔다.

먹거리가 풍성해서 참, 좋기도 하지만 또 너무 과식해서 건강관리가 필요하다.


밟는 찰진 땅도 좋고, 하늘도 좋고, 공기도 딱 좋다.

뜨거운 여름에 나오지 못했던 발걸음이라

날이 선선해지자 마자 신나서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하늘과 주위 풍경에 시선을 뺏기다 보니

길을 잘못 들어섰나 보다.


"여긴 어디? 난 누구?"


난, 지렁이다.

나의 길은 꽃길이 아니라 흙길이어야 맞는데

여긴 꽃길도 아니고 아스팔트 길이다.


꿈틀꿈틀 오랫동안 걸었더니 배가 까슬까슬해졌다.

아스팔트 위에 긁혀서 쓰리고 아팠다.


걸어도 걸어도 끝없이 펼쳐지는 아스팔트는 마치 사막과 같다.

점점 해가 더 뜨거워져 가을볕이 내리쬐여서 숨이 막혀 죽을 거 같다.

선선한 그늘이 필요하다.

바로 그때, 그늘이 드리워졌다.


'아후~ 이제 살 것 같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가 무섭게

그 그늘이 사람의 커다란 그림자임을 알게 됐다.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가 무섭게

그 자가 발을 번쩍 들어 나를 밟으려 한다.


"꺄악~ 엄마야. 사람 살려~ 아니, 지렁이 살려!"


꿈틀꿈틀 빨리 움직여보지만 아무리 움직여도

발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속도를 빗겨가지는 않는다.


"으으윽~이제 죽는구나! 길을 잃고 헤매다 객사해버리고 마는

나의 혹독한 운명이여! 엄마는? 아빠는? 나에게 허구한 날, 잔소리해대는 오빠는?"


지긋지긋했던 오빠의 잔소리마저 그리워지다니!

이제 정말 죽을 때가 된 거 같다.


"엄마야~ 지렁이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나를 보지 못하고 밟으려 했던 거 같다.

뒤늦게 나를 보고 스스로도 놀란 듯 발을 비껴내며 밟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에게서 '찰칵' 소리가 났다.

어느새인가 그녀가 핸드폰을 꺼내 들고 나를 찍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머... 나. 찍혔네~이건 초상권 침해야. 찍으려면 말이라도 하든가!

어떻게 포즈를 이렇게 취해야 잘 나오려나?"


나를 밟지 않은 보은으로 나름 신경 써서 포즈를 취해줬다.

사진을 다 찍었는지 그녀는 사라졌다.


다시 뜨거운 햇살이 내 몸을 내리쬤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말라죽을 거 같다.


가끔씩 길을 가다 아스팔트 위에 바짝 말려진 채 사체로 별견되는 동료들을

보게 된다. 지렁이들 사이에서는 연쇄 살인범이 출동한 거 아니냐 설왕설래했던

사건이었지만, 그 진위는 뜨거운 가을 햇살이었다.

그래서 인간들 사이에는 딸은 봄볕에 며느리는 가을볕에 내 보낸다고 하지 않았는가?


'아, 이대로 나도 혹사되어 죽을 수 도 있겠구나! 아, 참으로 혹독한 날이로구나!

길을 잘못들어선 관계로 이제 사망 길로 가는구나!'


마음속으로 참담한 생각에 절망했다.

바로 그때, 내 몸이 부웅~ 하늘로 드리워졌다.


'으으으으윽~ 이건 대체 또 무슨 일이냐고?'


내 몸을 양쪽으로 옥죄고 있는 것은 인간들이 사용하는 나무젓가락이었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야?'


눈을 부라리며 노려보았다.(아, 물론 티가 안나는 거 안다.)

깜짝 놀랐다. 아까 나를 밟으려 했던 그 여자였다.


그 여자는 나를 빤히 지켜보며 인상을 썼다.


"으으~ 징그러워!"


대놓고 까대는 여자!


'쳇! 나는 네가 더 징그럽게 생긴 걸로 보이거든!'


그녀가 알아듣지 못할 걸 알면서도 반항을 해본다.

그녀의 시선으로는 꿈틀대는 지렁이로 보이겠지만

나는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필사적으로 항거하는 거다.


잠시 후, 공중으로 들렸던 나의 몸이 낙하했다.


"꺄아아악악~~~"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어지럽고 속이 메슥거렸다.

잠시 기절한 듯 정신을 잃었다.


"에구구~ 여긴 어디? 난, 누구?"


난 지렁이다.


'어라? 그런데 여기는 아스팔트가 아니라 내가 다니던 촉촉한 산책길이네.'

난 놀라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에게 징그럽다고 말한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너, 환경 파수꾼이라며? 나도 꼬마 환경파수꾼이야. 너랑 나랑 환경을 위해, 지구를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하니까, 살려주는 거야. 열심히 지구를 위해서 일해 다오!

난, 간다. 안녕!"


쿨하게 손을 흔들고 사라지는 그녀!

멀어져 가는 그녀의 어깨 위로 예쁜 캐릭터 분홍색 가방이 메어있었다.


아무래도 근처 유치원에 다니는 여자아이인가 보다.


"안녕~ 나를 살려준 인간이여! 네 말대로 나는 너를 위해 오늘도 열심히 땅을 기경할게.

고맙다."


아, 오늘은 정말 죽을 뻔할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혹독한 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시 살아난 이유는 나에게 지구의 환경을 지키라는 사명이

주어졌음이 아닐까 비장하게 생각해본다.


"나는 지구를 지키는 환경파수꾼! 징그럽다 말해도 상관없다오!

난, 지렁이니까. 제발 밟지만 마시오. 밟으면 꿈틀댈 수밖에 없는 것이 지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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