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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해 Feb 08. 2021

아프다는 말이 싫다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유치원에서 견학을 마치고 교실로 돌아와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말했다. 보호자 동행 차량은 교통사고로 (도로가 막혀) 늦어진다고. 그 말을 죽었다고 듣고는 엄마가 도착할 때까지 울었다.


난 어릴 때부터 엄마의 건강을 염려하기보다 죽음을 걱정했다.

엄마는 자주 아팠다. 아빠는 엄마가 아픈 걸 좋아하지 않았다. 아파서 싸웠고 싸우고 나면 또 아팠다. 엄마의 말을 빌리면 아빠는 늘 본인의 끼니 걱정뿐이었다지만 글쎄. 나부터도 엄마가 아프면 걱정이 되면서도 축 가라앉은 뜨겁고 무거운 공기가 싫었다. 병원은 갔어? 약은? (이마에 손을 올리며) 열 많이 나? 괜찮아? 와 같은 리액션을 어떤 것도 취할 수 없었다. 아픈 엄마는 가시를 바짝 세운 고슴도치 같았다.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자신의 끼니만 걱정하던 아빠가 없는 지금, 싸워서 아플 이유는 사라졌지만 엄마는 더 자주 아프다. 이제는 병원도, 의사도, 약국도 믿지를 못한다. 인터넷 검색으로 병명을 찾아 그들이 알려주는 대로 치료를 한다. 걱정이 증폭되는 이유다. 매일 전화를 하면 매일 다른 양상으로 아프다. 아프다는 말을 왜 하게 만드냐며 짜증까지 내는데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다. 난 여전히 엄마의 죽음을 걱정하니까. 갈수록 더 많이.


남편도 자주 아프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엄마처럼 날카롭지 않아 리액션이 가능하다. 약 먹어라, 병원 가라 하지만 좀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한다. 왜 그들은 한결같이 병원을, 약을 믿지 못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잔소리로 들리지 않을까. 그저 괜찮아?라는 말이면 될까.




나는, 웬만해서는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프다고 말할 만큼 아프지도 않았다. 아이를 낳는 순간까지도 죽을 정도로 아프지는 않았다. 그냥 딱 견딜 정도? 아프다는 말을 지겹게 들어서일까, 고통에 둔감한 걸까. 문병 온 엄마는 쟨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안 해, 속이 깊은 건지... 하며 큰 숨을 내뱉었다.  


천근만근 아픈 내 몸에, 걱정하는 너의 마음까지 더해지면 너무 무거울 것 같았다. 웃고 놀다 보면 잠깐 (아픔을) 잊을 수 있지만, 아프다고 말을 하면 이전의 분위기로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단지 그 때문이다. 속이 깊어서가 아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싫어한 건 아프다는 말이 아니었다. 그로 인한,


내 안의 쓸데없는 걱정들, 아픈 사람의 날카로움, 침체되는 분위기 그리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 무심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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