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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해 Apr 28. 2021

폄훼가 싫다

돌 맞은 개구리

양말을 짝짝이로 신었다고 너 바보야? 멍청이야? 소리를 들어야 할까. 그저 덜렁대지 말라고 하면 될 것을.

엄마는 이 말을 자주 했다. 바보같이! 멍청하게! 사소한 실수에 이 말을 들으면, 아니 어떤 경우에도 이 말은 화가 났다. 바보가 아니면, 멍청하지 않으면 그렇게까지 화가 날 이유가 없지 않냐는 말에 더 화가 났다.

대여섯 살 아이들이 뿔이 났을 때 친구한테 하는 말, 정도로 가볍게 여기면 될 텐데 난 이상하게 그게 안됐다. 진짜 바보라서 그런가? 어쨌든 난 저런 뉘앙스의 말들은 누구한테도 하지 않는다. 내가 싫으니까.


세상은 장난으로 던진 돌에 맞아 죽은 개구리를 탓했다. 나약하고 해이하고 미련하다고. 아무도 개구리의 아픔을 봐주지 않았다.




여럿이 모여 술판을 벌이면 꼭 한 명을 깎아내리면서 웃음을 유도하는 사람이 있다. 돌아가며 깎는 재미에 모두가 심취해 있을 때, 한 명 빼고 모두가 즐거울 때 이제 그만 해야 할 거 같은데, 곧 터질 것 같은데, 한 발 물러서서 눈치만 본 나도 사실 그들과 똑같았다. 그만 하라고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했으니까.      

정말, 진짜, 제일, 너무 싫은 건 깎일 대로 깎이던 사람이 이제 그만하라고 버럭 하는 순간, 개그를 다큐로 받아들인다며 손가락질하는 사람 또한 선동자라는 것이다. 맞아. 너희한테만 개그지 그 사람한테는 다큐야.

그리고 안타깝게도 선동자는 매번 선동자였고 리더였고 물주였으며 또한 갑이었다.


시청률 보장 수표가 있다. 라면 먹방 그리고 이것! 시청률을 끌어올리려면 누군가의 희생은 당연했다. 그들은 웃겼으면, 재밌었으면 됐다며 타당성을 부여했다. 바보라고, 못생겼다고, 뚱뚱하다고, 대머리라고, 늙었다고 시시덕거렸다. 모두가 웃었으니 그걸로 된 걸까. 저 사람 속은 괜찮을까? 다친 마음은 통장이 위로해주나? 왜 나는 불편하지?




결국 웃자고 하는 말에 죽자고 덤벼드는 사람이 문제고, 개그를 개그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문제다. 내가 문제다. 바보가 아니니까 바보라고 해도 되고, 못생기지 않았으니까 못생겼다고 해도 되는 건가? 의도가 불순하지 않으니 괜찮은 건가? 듣는 사람이 어떻게 듣느냐가 핵심 아닐까.


왜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해도 되는데 난 그렇게 들으면 안 되는 건지. 왜 내가 그렇게 들으면 꼬였다고 하는 건지. 왜 나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야 하는 건지. 말한 사람은 기억도 못하는데 왜 나만 두고두고 곱씹고 있는 건지. 왜 저 사람은 필터가 없는 건지, 왜 내가 알아서 걸러야 하는 건지. 늘 답답했다.


마스크를 쓰는 것처럼 필수로 3중 필터를 장착했으면 좋겠다. 머리에서 한번, 목구멍에서 한번, 입에서 한번 걸러줘 유해요소 하나 없이 깨끗한 말만 나오면, 숨 쉬기 정말 편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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