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운명이었다
얼마 전 인터넷으로 사주를 봤다. 이 사주란 것은 거금을 들인 순간, 재미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맞지 않는 부분을 보면 분명 100% 적중률은 아닌데 이상하게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들이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과거는 그랬었나? 싶을 정도로 긴가민가했고, 성격은 소름 끼칠 정도로 맞았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가림이 너무 철저해서 좋아하는 일이라면 밤을 새도록 몰두하며, 싫은 것이라면 징그러운 것을 보듯 외면한다 (…) 온갖 정성을 기울이다가도 싫어지면 당장 그 자리에서 끝내버리고 (…) 누구에게 의존하거나 도움을 바라지 않는다.
자미두수에서는 이와 같이 성격을 풀이했다. 웃긴 건 풀이 방법이 달라 내용에 차이가 있다는 산명점성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
왕성한 독립심을 가지고 있다. 한번 결심하면 주위에서 누가 무슨 소리를 하든 절대로 굽히지 않는 완고함이 특징으로 인생을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형이다 (…) 무슨 일이고 생각대로 하고 싶은 타입이기 때문에 샐러리맨으로는 적당하지 못하다.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있어도 조직적인 규율이나 규칙을 좋아하지 않아 그 테두리를 빠져나가고 말 것이다. 상사에게는 정말 부리기 힘든 상대다. 이를테면 상사로부터 잡무를 부탁받았을 때도 그것이 명령하는 말투면 금방 시무룩해진다. 일단 시키는 대로 일을 처리하기는 하지만 다 했다는 보고 한 마디 없이 퇴근하고 마음속으로 반항심을 불태운다.
주체할 수 없었던 반항심, 잦은 이직은 모두 운명이었던가.
회사를 그만둘 때도, 누군가가 미치게 싫을 때도, 열 번을 잘하다가도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걸 망가뜨릴 때도... 나는 대체 왜 이럴까, 이렇게 살아야 할까? 어느 날은 스님이, 어느 날은 수녀가 되고 싶었다. 어느 날은 죽고 싶기도 했다. 그래야 번뇌와 번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며 알 수 없어 괴로워하는 일을 번민이라 한다. 번민하는 자의 눈은 빛을 잃어 검다. 지나간 것을 떠올리며 잊지 못해 슬퍼하는 일을 번뇌라 한다. 번뇌하는 자의 눈은 분노로 붉다. 하여 번민은 검고 번뇌는 붉다. 형체를 갖추지 못한 그 검고 붉은 것이 그토록 사람을 괴롭히는데 다시 만나 한 몸이 된다면 이 세상이 어찌 될 것 같으냐. 산 자와 죽은 자 모두가 번뇌와 번민의 사슬에 붙들려 분노하고 절망하며 살아가는 세상. 그 끝을 알 수 없는 밤의 세상. 그것이 바로 지옥이다.
영화 <제8일의 밤>을 보며 다시 한번 느꼈다. 내 안의 세상은 이미 지옥이었다. 하루하루 누군가에게, 아니면 혹은 나에게 죄를 짓고 사는 악귀가 그 누구도 아닌 '나'였다. 이 악귀가 더는 힘을 쓰지 못하게 하려면 어찌해야 할까. 영화에 나온 것처럼 검고 붉은 것을 멀찌감치 떨어뜨려 각각 봉인해야 할까?
운세는 성명학, 평생사주, 산명점성, 자미두수, 토정비결 네 가지로 양이 어마어마했다. 퍼센티지로 따지면 분명 좋은 내용도 그에 맞게 있었을 텐데 그건 눈에 들어오지도, 머리에 남지도 않았다. 맞지 않았으니까.
아주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다들 그렇지 않나? 호불호도 고집도 누구나 있지 않나? 나만 그렇지는 않을 텐데? 그런데 아니다. 나만 그랬다. 남편의 사주도 같이 봤는데 성격적인 부분에서 만큼은 사람이 어떻게 이러지? 싶을 정도로 모가 난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그게 너무 신기했다. 역시 내가 이상했다.
사람 성격 다 거기서 거기라고, 단지 숨기고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어찌 보면 합리화였다. 말도 안 되게 엉망으로 쌓아놓은 성이 만리일지라도, 다시 차근차근 제대로 쌓지는 못하더라도, 하나씩 거둬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생을 다할 때쯤이면 평평한 땅만 남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지금 같아서는.
그리하여 산명점성에서 말하는 말년운처럼만 되기를...!
정신적으로 안정된 노후가 열려 있다. 명예나 재산 등에 무관한 일종의 깨달은 경지의 노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