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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호 Apr 16. 2022

오늘의 커피?

#처음 #커피 #애정

군 제대 후 복학하고 있었던 일이다. 학보사 동기, 선후배들과 밥을 먹고 카페에 갔다. 학교 앞 삼거리의 패스트푸드 양대산맥 중 하나였던 KFC 자리에 새로 들어선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동기와 선후배들이 각자 주문할 메뉴를 말했다. 그들은 잠시 고민하더니 처음 듣는 커피 이름을 지하철 1호선 역명을 외듯이 줄줄 읊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넌 뭐 마실래?" 메뉴를 받아 적던 친구가 물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커피라고는 밀크 커피와 블랙커피밖에 몰랐으니까. 안타깝게도 메뉴판에는 밀크와 블랙 같이 심플한 단어는 보이지 않았다. 


자판기 앞에선 거침이 없었는데 카페에선 패잔병처럼 눈치를 봤다. 도서관 자판기 앞이었다면 자신 있었을 텐데. 밀크 커피와 데운 우유를 한 잔씩 뽑아서 반반씩 섞은 시그니처를 선보였을 게다. 레시피의 선택과 행동에는 주저함과 군더더기가 없었겠지. 이래서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축구 전문가들이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역설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서 있던 곳은 원정 경기장이었다. 결국 급하게 메뉴판 맨꼭대기를 흘끔 보고 말했다. 커닝하는 아이처럼. "나는 오늘의 커피로 할게."


"오늘의 커피?" 친구가 반문했다. 뭔가 잘못이라도 한 아이처럼 내 얼굴은 한순간에 굳었다. 그녀의 눈빛엔 오늘의 커피가 무슨 커피인지 알고 주문하느냐는 의심이 그득했다. 하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괜스레 먼산만 바라봤다. 그날 처음 보는 프랜차이즈 카페 인테리어에 놀란 표정을 숨긴 채 짐짓 태연한 척하면서. 한편으로 그저 커피, 그러니까 오늘의 커피가 빨리 나오길 기다릴 뿐이었다. 


내심 오늘의 커피가 몹시 궁금하기도 했다. 무슨 색일까. 블랙커피처럼 블랙일지 아니면 밀크 커피처럼 브라운일지 상상했다. 늘 처음으로 떠오르는 건 진부하다. 머릿속에 저장된 정보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해서다. 고작 생각한 게 블랙이나 브라운이라니. 아예 사이다처럼 투명하거나 칵테일처럼 트로피컬 색상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나름 머리를 굴리고는 메뉴명에서 힌트를 얻고 잠정적인 답을 냈다. 오늘의 커피가 주인장이 매일 엄선한 특별한 커피일지 모른다고 기대한 것이다.


얼마 되지 않아 커피가 나왔다. 생애 처음 영접한 오늘의 커피는 자판기에서 내려주는 블랙커피와 비슷했다. 머릿속 커피와 크게 불일치하지 않아 안도하는 한편, 실망하기도 했다. 메뉴판에서 오늘의 커피 값과 커피잔을 번갈아 보고는 미간에 세로 주름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옆 친구에게 들리지 않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자판기였으면 여덟아홉 잔을 뽑을 수 있겠구먼. 오늘의 커피의 정체가 드립 커피라는 건 한참 뒤에나 알게 됐다.


군대에서 제대하고 복학한 첫 학기, 오늘의 커피 사건 이후 카페는 점차 일상의 일부로 들어왔다. 카페는 놀이터이고 독서실이었으며 때로는 케렌시아였다. 매번 오늘의 커피를 시킬 수 없었던 나는 앞줄에 선 사람들과 친구들에게 힌트를 얻었다. 점점 아메리카노와 에스프레소, 카페라테, 캐러멜 마끼아또, 카페모카 따위의 메뉴들이 입에 익어 갔다. 어원과 역사를 알 수 없었던 검은 액체가 혀에 닿고 식도를 감싸며 넘어가길 몇 해를 거듭했다.


요즈음에는 하루도 커피를 거르지 않는다. 우리나라 성인 1인당 연간 커피 소비량이 353잔이라고 한다. 얼추 평균과 비슷한 정도다. 이제 나는 아메리카노와 롱블랙의 차이를 알고, 카페라테보다 플랫 화이트, 플랫화이트보다 두유 라테가 내 속에 더 편하다는 걸 안다. 달콤 쌉싸름한 에스프레소 콘파냐를 마시러 일부러 에스프레소 바를 찾아가기도 한다. 잘게 부순 얼음을 와자작 깨 먹고 싶은 날에는 샤케라토를 주문한다. 무언가를 알게 되면 더 알고 싶고, 알면 알수록 좋아하게 되고, 좋아할수록 즐기게 된다. 내게는 커피가 그랬다.


일본 교토 여행 때 들렀던 블루보틀 매장. 일본 전통식 가옥에 카페를 꾸민 게 이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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