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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호 Apr 24. 2022

안 쓰려고 했던 이야기

#이야기 #추억 #똥

내가 말랑말랑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하자, 엄마는 그 사건에 대해 쓰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야기는 어린 조카들이나 좋아할 거라고 잘라 말했다. 그런데도 엄마는 잊을 만하면 그 이야기를 썼냐고 물었고, 매번 안 썼다고 답하면 이내 아쉬워했다. 다음에 쓰겠다고 마음에 없는 말만 반복했다. 미리 녹음한 테이프를 틀어놓은 것처럼. 더 이상 불효를 저지를 수 없었던 불초자는 오늘에서야 그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중학생 때의 일이다. 당시 유일한 낙은 축구였다. 그날도 나는 점심 도시락을 까먹자마자 운동장으로 돌진했다. 남색 교복 바지와 흰색 운동화가 흙먼지로 노래지도록 공을 찼다. 드리블도 패스도 슛도 모두 좋았다. 수업 시작종이 울리려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빼면 모든 게 완벽했다. 


모든 불운한 일이 그러하듯 그 사건도 가장 행복한 순간 예고 없이 벌어졌다. 불쑥 집에 들이닥친 불청객처럼. 갑자기 배가 아팠다. 오랜만에 싸주신 동그랑땡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활발한 움직임이 장 활동을 촉진시켰던 걸까. 처음에는 괄약근을 조여 위기를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그 손님은 내 복부를 똑똑똑 노크하는 게 아니라, 쾅쾅쾅 다급하고 신경질스럽게 두드리는 게 아닌가. 찰나의 순간 나는 직감했다. 하교 때까지 문을 열어 주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것을.



갈림길에 섰다. 학교 화장실로 직행하느냐 조금 우회하더라도 집으로 향할 것인가. 후자를 택하면 5교시 수업에 늦을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가장 안전한 길이었다. 선생님께 조금 혼만 나면 될 일이었다. 이에 반해 전자의 리스크는 컸다. 일을 치르는 동안 나의 은밀한 사생활을 보호해줄 건 5센티미터 가량의 부실한 화장실 문짝뿐이었다. 언제든지 문 아래의 틈과 문 위의 휑한 공간으로 짓궂은 녀석들이 공격할 여지가 있었다. 그들은 피 냄새를 맡은 하이에나처럼 덤벼들 것이고, 나는 한 손으로 허리춤을 잡은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지상전과 공중전을 동시에 치러야 할 게 틀림없었다. 한바탕 전투를 치르고 초췌한 몰골로 나오면 나는 분명 유명 인사가 되어 있겠지.


내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늘 모든 결정에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괄약근이 얼마나 버텨줄지 한낱 미물인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부리나케 교문을 빠져나와 전력으로 질주했다. 목적지는 집, 지름길로 680미터. 10여분 후면 온갖 억압과 굴레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다행히 당시 나는 꽤 빨랐다. 50미터 거리를 6초대에 주파할 만큼 준족의 소유자였다.


육중한 현관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닫혀 있었다. 복부에 느껴지는 리듬에 맞춰 문을 부술 듯이 두드렸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엄마가 외출한 것이다. 바지 주머니엔 집 열쇠 따위는 없었고, 핸드폰은 그로부터 3년 후에나 널리 보급될 예정이었다. 눈앞이 노래졌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 현관문 앞 계단에 주저앉았다. 모든 걸 놓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볼을 타고 흐르는 게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정도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몸을 배배 꼬고 악으로 버티는 것뿐이었다. 실제로 급한 신호가 왔을 때, 외괄약근이 힘을 보태면 최장 3분 가량 더 참을 수 있으며, 다리를 꼬아 골반에 힘을 주면 그 시간이 마법처럼 길어진다. 당시에는 의학적 지식이 없었고 본능적으로 대처한 것이지만.


멀리서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203호도 204호도 304호도 아닌 틀림없이 303호로 향하는 엄마의 경쾌한 단화 소리였다. 당시 인기를 끌었던 TV 프로그램인 <우정의 무대>에서 진행자 뽀빠이 이상용   고쳐 물어도 한결같이 답할  있을  같았다.  단화 소리는 우리 어머니 발소리가 확실하다고. 드디어 핸드백을 어깨에 걸친 엄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원망과 미움이  녹듯 사라지고 서광이 비쳤적어도 절박했던 내게는 그랬다.


엄마한테 당신이 그토록 바라던 이야기를 다 썼노라고 들려드리니 박장대소하셨다. 그때 내 얼굴과 상황이 떠오르는지 배꼽을 잡으셨다. 웃음이 잔잔해질 때를 기다렸다 내가 물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교훈이랄까, 메시지는 뭘까?" 엄마가 답했다. "재미있으면 그만이지. 꼭 메시지가 있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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