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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호 Apr 26. 2022

내비게이션 없는 여행

#여행 #좌충우돌 #인생

애초 이럴 생각까진 없었다. 처음 여의도 더현대 서울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서 강남 방면으로 액셀레이터를 밟을 땐 미처 몰랐다. 6시간 뒤 강릉 강문해변 포이푸에서 육즙이 줄줄 흐르는 치즈버거를 한입 베어먹고 있을 줄.


믿을 건 도로 표지판밖에 없었다. 2011년식 아반떼에는 출고 때부터 내비게이션이 없었다. 내비 말고도 아반떼에는 없는 게 많았다. 있는 것보다 없는 걸 찾는 게 빠를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런 내 차를 가리켜 깡통이라고 불렀다. 차는 굴러만 가면 된다는 미니멀한 가치관을 가진 탓이다. 천성적으로 거추장스러운 게 달갑지 않았다. 무소유를 설파했던 법정 스님이 보셨다면 엉덩이라도 두드려 주셨을까. 참 잘했다고.


목적지는 대전 집. 일단 여의도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였다. 서울에서 길을 잃으면 두 도로만 기억하면 된다. 강북에선 강변북로, 강남에선 올림픽대로. 물론 대부분 내비가 있을 테니까 굳이 외울 필요는 없다. 나는 한양에서 김서방을 찾던 조상처럼 표지판에서 올림픽대로를 찾았다. 이쯤에서 스마트폰으로 카카오 내비나 티맵을 켜면 될 일이지, 웬 바보 같은 짓이냐고 반문할 수 있다. 스마트폰이 꺼졌다. 보조 배터리는커녕 충전기도 챙기지 않았다. 전날 퇴근할 때만 해도 주말 정오 무렵에 올림픽대로 위에 있을 줄 몰랐으니까.


올림픽대로는 만원이었다. 서울 사람들은 한강의 기적을 일군 특별 시민답게 부지런했다. 경부고속도로 부산 방면은 만남의 광장이었다. 977만 서울 시민들이 모두 집을 비우고 나온 듯했다. 날이 좋지 않아도 날이 적당해도 모든 날이 좋다고,라고 남자 주인공이 고백하는 드라마가 히트를 친 나라에서 그날은 너무 좋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대전 집으로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그때 스타워즈 광선검처럼 시원하게 뻗은 길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고통 속에 비치는 한 가닥 구원의 빛줄기 같았다. 그리 멀리 않은 곳의 표지판에는 '원주 인천'이라고 적혀 있었다. 사실 내심 바다가 보고 싶었다. 황해는 황하처럼 탁해서, 남해는 다도해라는 별칭답게 섬이 많아서 싫었다. 모름지기 바다라면 탁 트인 동해였다. 핸들을 오른쪽으로 홱 틀었다.


아뿔싸! 영동고속도로는 주차장이었다. 영동고속도로의 첫 퀘스트인, 총길이 1,450미터의 마성터널을 통과하는데 무려 20분이나 걸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주유 경고등도 점등됐다.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한가로운 주말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견인되고 싶진 않았다. 결국 일보 후퇴했다. 고래 잡으러 동해바다로 떠나려는 간밤의 꿈은 용인 IC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오로지 작가 이름값만 보고 산 책이 있다. 류시화 시인의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이다. 그 책에는 밑줄을 치고 가슴에 아로새긴 문장들이 많은데, 교통 체증을 연거푸 겪은 이의 뾰족해진 마음을 가라앉힐 구절도 있어 인용한다. 지도를 수없이 고치고 경로를 수정하고 멀어진 꿈을 붙잡는다. 그러나 그 길이 순탄하기만을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삶을 살지 않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험과 배움으로 가득한 여정을 거부하고 안전한 항구에 남아 있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낯선 용인 땅이었지만 언제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용인 IC 앞 삼거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일군의 빌딩들, 건물이 들어선 땅보다 논밭이 차지한 면적이 더 넓은 곳. 불현듯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용인 기숙학원. 고향 친구가 일하는 곳이다. 기름을 가득 채우고 다시 액셀을 밟았다.


학원 주차장에는 은색 BMW 스포츠카가 보이지 않았다. 차량 번호는 모르지만 대번에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흔하지 않은 차인 데다, 친구 녀석이 한번 태워준 터라 대강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차가 없다는 말은 녀석이 학원에 없다는 말이었다. 하! 되는 일이 없다고 툴툴거렸다. 학원을 떠나려고 할 때였다. 모퉁이에서 차량 두 대가 연이어 튀어나왔다. 차가 나온 곳은 학원 건물 뒤쪽이었다. 또 다른 주차장이 있다는 말이었다. 건물을 끼고 꺾었더니 비밀스러운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은색 BMW 스포츠카가 늠름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서 나오냐는 표정을 짓고 있는 친구에게 물었다.

"나랑 같이 강릉 갈래?"

"콜. 그런데 일 끝나려면 1시간 반은 걸리는데, 괜찮아?"

"어, 오히려 잘됐다. 지금 영동고속도로 주차장이야. 엄청 막혀."

"이따 내 차로 가자. 그런데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거냐?"


진정한 여행은 어딘가에 가는 행위 그 자체라고, 일단 도착하면 여행은 끝난 것이라는 소설가 위고 베를롬의 문장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요즈음 사람들은 끝에서 여행을 시작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어릴 적 성공의 표상이었던 홍정욱은 여행은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주 오랜만에 요즈음 사람 같지 않은 여행을 한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이 흘러나왔다.


강릉 세인트존스 호텔 1층에 있는 포이푸. 원래 사천해변에서 서핑숍 겸 식당으로 출발했는데, 강문해변 호텔에 분점을 낸 것이다. 치즈버거가 일품. 선택에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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