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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호 May 07. 2022

아버지의 생애 첫 드립커피

니 아버지가 커피 뭐 하고 싶다더라. 어머니는 무심하게 툭 뱉었다. 말소리가 텔레비전에 묻혀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아버지가 아무 말 없는 걸 보니 내가 전연 잘못 들은 건 아닌 모양이다. 니 외삼촌이 집에서 커피 만들어 마신단 얘길 듣더니 저러신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말이 없었다. 본인 의사를 전달하는데 별다른 힘을 쓰지 않는 건 아버지의 주특기다.


아버지로 말할 것 같으면, 물 이외의 음료는 거의 마시지 않는 데다, 가끔 내가 스타벅스나 아임일리터에서 아메리카노를 사다 드리면 원샷 때리는 사나이다. (특히 탄산음료는 질색하신다.) 어머니가 냉수 들이켜듯 마신다고 타박하면, 못 들은 체 자리를 피하기 일쑤다. 그런 분이 요 앞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 사 오라는 것도 아니고, 커피를 내려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얘기는 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청원이다. 그러면 나는 구청 민원실의 공무원이 된다. 민원인의 목소리를 듣고도 모른 체 할 수 없는 법. 솔루션으로 두 가지가 떠올랐다.


1. 커피 머신

2. 드립커피 도구


커피 머신에서는 광채가 났다. 20년 된 구축 아파트 주방의 격을 한 단계 끌어올려 줄 적임자였다. 바리스타가 포터필터를 홈에 끼우고 버튼을 누르자 에스프레소 원액이 추출됐다. 두 분을 소파에 앉히고 쇼케이스를 하듯 유튜브 영상을 보여드렸다. 볶은 원두를 곱게 갈아 고온고압으로 추출하는 게 에스프레소라고, 어쭙잖게 아는 내가 부연했다. 방앗간에서 참기름 짜는 거 같다고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저건 얼마야? 아버지에게 세상 모든 것의 가치를 평가하는 잣대는 단연 가격이다. 싼 게 십만 원 대고 쓸만한 거 사려면 백만 원은 줘야 할 걸요. 아유, 그럼 됐어. 값을 듣더니 아버지가 잘라 말했다. 더이상 볼 필요도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는 아버지 옷소매를 어머니가 붙잡았다.


드립커피 도구는 커피 머신에 비해 단출했다. 드리퍼와 서버가 한 세트였다. 드리퍼를 서버에 받치고 끓인 물을 드리퍼의 커피 가루에 통과시키는 식이었다. 저거야 저거. 어머니는 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해 정답을 외치는 출연자처럼 말했다. 아버지의 부러움을 산 외삼촌의 커피 도구였다. 저건 얼마야? 아버지가 물었다. 적어도 십만 원은 들 거 같은데요.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아버지는 손사래를 쳤다. 살 필요 없단 신호다. 아들이 사 준다고 할 때 해 봐요. 내가 사겠단 말은 하지 않은 터라 어머니 말에 적잖이 놀랐지만 잠자코 있었다. 어머니는 살면서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봐야 후회가 없다고, 앞으로 살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다고, 뭐든 하려면 돈이 드는 법이라고 일장연설을 늘어놓으셨다. 두 분은 일단 드리퍼와 커피 원두만 사는 것으로 극적인 타결을 보셨다. 언제나 그랬듯 두 분 카드가 아닌 내 카드로.



블루보틀 드리퍼는 희고 고왔다. 주방 등에 비추면 영롱하게 빛났다. 특히 지중해를 닮은 파란색 로고가 킬링 포인트였다. 어머니는 주방에  어울린다면서 연신 스마트폰 셔터를 눌렀다. 어머니에게  어울린다는 말은 고급스럽다의 동의어였다. 서버는 찬장에서 먼지를 쓰고 있는 유리잔으로 하면   같았다. 박물관 수장고에서 유물을 꺼내듯 조심스럽게 꺼냈다. 드리퍼 홈에  맞았다. 마치 원래  짝이었던 것처럼. 문제는 어머니 주문사항에서 누락된 그라인더였다. 드립커피 제조과정에 대해 설명드렸기 때문에 커피 분쇄기가 필요하다는  모르실  없었다.


어머니 주방은 군대 보급창고 같았다. 실로 거의 모든 게 있었다. 작년에는 제빵 바람이 불어 내가 베이킹 도구를 사려고 했는데, 어머니는 하부장 구석에서 거품기와 주걱, 볼, 계량컵 따위를 줄줄이 꺼내 쇼핑 의욕을 단박에 꺾은 바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이길 확률이 높았다. 주방 상부장과 하부장을 샅샅이 뒤져봐도 그라인더는 눈에 띄지 않았다. 스타벅스 갔다 올게요, 라고 말하고 집을 나서려는데 어머니가 낯익은 물건을 꺼냈다. 카드게임에서 상대가 테이블의 모든 칩을 가져가려는 순간, 마지막 비장의 카드를 꺼내 보이는 것처럼. 어머니의 조커는 도자기 절구였다. 짜잔!


어머니는 숙련된 조교처럼 나무 방망이로 원두를 빻았다. 사십 년 주부 내공이 빛을 발했다. 일정하고 빠른 속도로 원두를 빻으면서도 파편이 튀지 않았다. 이에 반해 아버지는 서툴렀다. 쓸 수 있는 원두보다 버려야 할 게 더 많았다. 절구에 방망이질을 할 때마다 팝콘 터지듯 원두 파편이 온 주방에 튀었다. 통통 두드리지 말고 지그시 눌러 갈아 봐요. 보다 못한 어머니의 원 포인트 레슨에도 금방 나아지질 않았다. 아버지의 찡그린 얼굴은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다고 항변하는 듯했다. 주방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경음악을 들으면서 그라인더로 우아하게 커피를 가는 모습을 상상하셨으리라.


무엇을 상상했든 주방은 금세 커피 향으로 가득 채워졌다. 향은 참 좋다. 아버지가 긴 침묵을 깨고 한마디를 했다. 정말 카페에 온 것 같다고 어머니가 거들었다. 근데 절구에 커피 향이 배었을 텐데 어떡하지? 내가 말했다. 어머니는 별일 아니라는 듯 이렇게 답했다. 이제부터 커피 향 나는 깨를 먹으면 되지. 이때껏 우리집 절구는 주로 깨를 빻는데 썼다. 아마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커피 향이 나는 깨가 되지 않을까. 두 분이 티격태격하시기도 하고 아버지의 기대와 현실이 조금 달랐지만,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만 사서 마셨으면 경험하지 못했을 일이다. 이 또한 인생의 목적지로 가는 여정에서 삶이 주는 선물이리라.


카페에서 파는 한 잔 분량을 소분하여 셋이 나눠 마셨다. 어머니는 입안에서 커피를 굴려가며 맛을 봤다. 쓴맛도 나고 신맛도 난다고 했다. 나는 다크 초콜릿 맛이 난다고 덧붙였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맛이 어떠냐고 물었다.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에게 한 편의 시 같은 심사평을 기대하듯이. 아버지는 대답 대신 커피잔을 들어 보여줬다. 펍에서 생맥주를 단숨에 들이켜고 잔을 흔드는 것처럼. 이미 다 마셨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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