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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호 Jun 04. 2022

상추 무침 사촌

#처음 #실패 #요리

우리 집에서는 아버지가 가장 일찍 일어난다. 알람 소리에 겨우 눈만 뜬 나는, 벽 너머 부엌에서 아버지가 사부작사부작 계란과 두부, 토마토를 삶는 소리를 듣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린다. 얼마 가지 않아 알람이 다시 울린다. 이번엔 핸드폰 알람이 아니고 전기압력밥솥이 요란하게 증기를 배출하는 소리다. 나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다는 걸 인정한다.


주방에서 아버지의 주특기는 삶기다. 오늘도 냄비에 물을 적당량 받아 불에 올리는 모습이 제법 주부 티가 난다. 특히 달걀 삶기에 꽤나 자부심을 갖고 있는데, 그 어려운 반숙과 완숙을 능숙하게 조리해내서다. 매번 달걀 껍데기를 까는데 애를 먹지만 말이다. 엄마가 물에 소금과 식초를 넣으라고 하는 말을 나는 여러 번 들었는데 아버지는 귓등으로 들으신 모양이다.


가정적인 아버지의 흠이라면 삶는 한 우물만 판다는 점이다. 요리 스펙트럼은 데치고 무치고 굽고 볶기로 넓디넓지만 아버지는 오로지 삶기에만 열중한다. 한 가지만 잘해도 먹고사는 세상이지만, 손이 부족한 우리 집에서 멀티 능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어느덧 주방에 들어온 지 5년이 훌쩍 넘었지만 삶기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엊그제 엄마가 응급실 신세를 지고 나서야 아버지는 무한한 요리 세계로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생애 처음으로 무침에 도전한 것이다.


아버지 첫 무침은 상추 무침이었다. 마침 주말 농장에서 수확한 상추 한 무더기가 냉장고에 써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볼에 간장 한 스푼, 참기름 한 스푼, 고춧가루 반 스푼, 깨소금 조금 넣어 양념을 만든 후에 상추를 뒤적거리면 된다고 알려줬다. 아버지는 생각보다 간단한 조리법에 자신에 찬 눈빛으로 화답했다. 엄마는 간을 보고 싱거우면 멸치아주 조금 추가해도 된다고 덧붙였다.


웩. 기어이 삼키지 못하고 뱉었다. 전기에 감전된 듯 얼굴이 부르르 떨렸다. 입안에는 짠내가 그득했다. 반찬 용기에는 상추가 무더기로 생기를 잃은 채 곤죽이 되어 있었다. 절인 배추도 이보단 형편이 나았을 것이다. 내가 맹물로 입을 헹구고 말했다. “무침이 아니라 소태야 소태, 상추 소태!” 엄마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명 아버지가 먹을 만하다고 했다면서 다시 먹어 보라고 덧붙이면서. 나는 냉수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버지는 레시피대로 했다고 말했다. 맛만 좋은데 괜히 생트집을 잡는다는 것이다. 결국 주부 경력 40년의 엄마가 해결책을 내놓았다. 냉장고에 상추 남은 거랑 당근을 채 썰어 추가로 넣으라는 것. 하지만 그 정도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분명 간장이든 액젓이든 간에 숭덩숭덩 넣은 게 틀림없었다.


나는 한 시간 전 당신이 한 일을 알고 있다는 듯 물었다.

“아버지, 간장 한 스푼 넣은 거 맞아요?”

아버지는 당연하다는 듯 집게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멸치 액젓은요?”

이번에는 뜸을 들이다 조금이라고 얼버무렸다.

“간은 봤어요?”

“아이고, 그만해라.”

엄마는 주말 대낮에 부자가 대거리하는 모습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엄마도 요새 나이 먹어서 그런지 간을 못 봐.”

엄마 말에 순간 아버지에게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어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저녁 준비를 하려고 냉장고를 열었더니 상추 무침이 깜쪽 같이 사라졌다. 거실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엄마에게 상추의 행방을 물었다. “그거 아버지가 버리셨어.” 엄마가 눈웃음을 지으면서 답했다. “아까 슬쩍 물어보니까 멸치액젓을 글쎄 두 스푼이나 넣었다고 하시더라.” 그랬다. 상추를 입안에 구겨넣자마자 일순간 혀를 거쳐 뇌의 미각 피질을 강타한 짠맛은 메이드 언더 더 씨였다.


멸치액젓이 우리 집 요리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하루는 미역국을 끓이는데, 아무리 소금과 간장을 투하해도 밍밍했다. 그때 맹탕 미역국 선생을 구제한 게 멸치액젓이었다. 백종원 선생님의 레시피에 따라 고작 한 스푼 넣었을 뿐인데 풍미가 확 살아났다. 그 후로 간장만으로 맛이 나지 않을 때 이따금 액젓을 조금 넣는다. 단, 액젓이 간장보다 짜기에 간을 보며 조금씩 추가한다. 이런 내막을 알 리가 없는 아버지가 액젓을 들입다 부어 사달이 난 것이다.


아버지가 냉장고에 남은 상추로 재도전하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엄마는 그것마저 못쓰게 되면 장어구이는 뭐랑 먹으려고 하느냐면서 극구 만류했다. “주말 농장에 가서 따오면 되지.” 아버지는 이렇게 답하곤 너털웃음을 호탕하게 터뜨렸다. 엄마와 나는 손사래를 치며 제발 참아 달라고 사정사정했다. 아버지에게 상추 무침을 권했던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아버지, 어제도 엊그제도 그랬듯이 내일도 언제나 삶기 외길만 걸어주세요. 혹시 알아요. 삶기 장인으로 인생 2막을 여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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