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호 Jul 06. 2022

매일이 시험

#회사 #전보 #적응

여전히 전화벨이 울리면 무섭다. 상대가 누구일지 무엇을 물을지 알 도리가 없어서다. 만악에 그걸 미리 알 수 있으면, 가려 받고 싶은 심정이다. ‘만약’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어서 나는 오늘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지그시 누른 채 수화기를 든다.


1년 전 봄, 지금의 부서로 자리를 옮겼다. 이따금 지인들이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딱 잘라서 한 단어로 답하기 곤란했다. 보통 회사에는 없는 부서여서다.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을 설명하는 건 꽤나 성가신 일이다. 차라리 근사치로 답하는 편이 낫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기획예산 같은 거야.” 이러면 정말 알겠다는 건지, 할 말이 없어서인지 더이상 묻지 않았다.


그전에는 자리의 성격이 비즈니스든 소개팅이든 간에 이렇게 답했다. “홍보 해요.” 흡족한 답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기획예산 같은 거’보단 나았다. 나는 아둔해서 뜨거운 맛을 봐야 뜨거운 줄 안다. 오래전 주전자가 엎어져 온수가 손등을 덮쳤을 때에도 그랬다. 그때 나는 ’아, 뜨겁다.’, 라는 말을 외국어처럼 떠듬떠듬 읽고 나서야 손을 뺐다. 주변 사람들이 당사자보다 더 놀란 나머지 호들갑을 떨었다. 내 손등은 이미 삶은 오징어처럼 빨개진 뒤였다.


홍보와 기획예산,  세계가 작동하는 언어는 완전히 달랐다. 화성에서  남자와 금성에서  여자처럼. 홍보가 언어에 의해 작동한다면 기획예산은 규정과 숫자에 의해 움직였다. 일찍이 숫자와 상극이라는  눈치챈 나는 문과로 도피했는데, 결국 돌고 돌아 다시 만나게  . 지금은 무작정 도망가지도 못하고 있다. 밥벌이의 지엄함 알아서다. 이러니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갈 수밖에.


매일 시험을 치르는 기분이랄까. 다행히도 대개 질문은 일차원적이다. 삼각형 내각의 합을 묻는 문제처럼. 그리 어렵지 않다. 설령 외우지 못했더라도 걱정하지 않는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다. 나는 귀와 어깨 사이에 수화기를 끼운 채 규정집을 뒤적인다. 책자는 자주 모니터로 바뀐다. 조금 모양 빠지지만 어쩌겠는가. 전화를 거는 쪽은 웹서버가 정보를 출력하듯 척척 답을 내놓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골치 아픈 건 응용문제다. 어려서부터 어려운 문제를 맞닥뜨리면 머리부터 쥐어뜯었던 습관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지금도 단박에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들으면 얼굴이 얼얼해진다. 이럴 땐 감정이 앞서는 동물인지라 문제 출제자에게 잘못을 돌린다. 도대체 이런 걸 왜 묻는 거야. 소크라테스도 동네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질문을 하는 통에 사람들한테 미움을 사지 않았나.


처음에는 옆자리, 옆옆자리, 그 다음에는 건너편 직원에게 물었다. 전화를 건 이에게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이따 전화를 해 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하지만 오래할 짓은 아니었다. 결국 스스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수화기 너머 상대가 퇴근을 늦추는 악당이 아니라 새로운 가르침을 주려는 선생님으로 여기기로 한 거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면 새로 알게 된 내용을 한글 파일에 입력해 둔다. 이 파일을 나는 기출문제집이라고 부른다. 고시생들이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걸 1회독이라고 한다. 반복하여 회독수를 높일수록 합격 확률도 덩달아 높아진다. 나는 작년에 새 업무를 맡은 터라 겨우 1회독을 했을 뿐이다. 내후년쯤, 그러니까 기출문제집을 3회독을 하고 나면 전화벨이 무섭지 않을 때가 오겠지.



매거진의 이전글 홈플러스가 사라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