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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호 Jul 07. 2022

홈플러스가 사라졌다

#소개팅 #여자 #변화 #코로나

지난주 토요일 낮에 고교 동창들을 만났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게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우리는 탄방동 세이백화점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은행동 이안경원이나 둔산동 갤러리아 타임월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대전에서 약속 장소로 사랑받는 곳이다. 식당이 밀집해 있어서 메뉴 고르기 수월할 뿐 아니라 영화, 쇼핑 등을 즐길 수 있는 백화점과 마트도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 시계는 11 50분을 지나고 있었다. 약속시간까지는 10 남짓이 남았다. 삼거리에서 좌회전만 하면 목적지가 시야에 들어올 것이다. 하지만 이미 지하차도를 빠져나온 차량들이 좌회전 차선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쩔  없이 직진했다. 겨우 두어 블록 정도   건데 방향감각을 상실했다.


나는 애타게 홈플러스를 찾았다. 길을 잃을  랜드마크를 기준으로 삼아 정상 궤도에 오르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한데 홈플러스가 보이지 않았다. 길을 잘못  걸까. ‘이쯤에 있어야 하는데 ‘여기가 아니었나?’ 바뀌려는 찰나 낯익은 예식장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지각을 면했다.


“오다 보니까 홈플러스 없어졌더라.”

“응, 나는 시야가 트여서 좋던데.”

“언제 철거한 거지?”

“글쎄, 나도 탄방동에 오랜만에 와서 모르겠다.”

홈플러스는  자리에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취를 감춘 뒤였다. 이제는 홈플러스가 아닌 홈플러스 터로 불러야 맞을 듯한 장소는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었다. 왠지 이가 빠졌다는 문장으로 표현할  없는 공허함이 덮쳤다. 아이들이 떠나고   운동장처럼.


문득 소개팅으로 처음 만났던 여성 분과 오밤중에 탄방동 홈플러스 주차장을 헤맸던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은 대개 서랍 속에 있다가 열쇠 구멍에 꼭 맞는 열쇠를 꽂았을 때 세상 밖으로 나온다. 나에게 장소는 기억의 문을 여는 열쇠 역할을 한다.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들렌처럼. 아마도 해질 무렵 만나서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피자와 파스타를 먹었던 거 같다. 그런 레스토랑은 얼굴에 난 잡티와 주름을 가려줄 만큼 어두워 첫 만남에 안성맞춤이다. 주변 테이블에서도 어색한 공기가 부유했다.


우리는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카페는 스터디룸을 갖추고 있어서 그런지 밤늦게까지 영업을 했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는데 그녀 어깨너머로 밤하늘의 농도가 한층 짙어질 때까지 말을 주고받았으며 손으로 입을 가린  웃기도 했다. 분위기에 젖어서인지 처음 만난 여자 분에게  해도  말까지 쏟아낸  흠이라면 흠이었다. 각자의 핸드폰을 밝혔을  이미 자정 무렵이었다. 다음을 기약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에 주차하셨어요?”

“홈플러스요.”

“저도요.”

대략 이런 대화가 오갔으리라.  분과 나란히 걸으며 못다  말을 나눴으면 좋았으련만. 멀리서 보아도 홈플러스는 암전된  적막했다. 순간 불안감이 치밀어 올랐다. 홈플러스에 도착했을  매장 영업이 종료된  물론이고 주차장 출입구도 폐쇄되어 있었다. 어찌어찌 주차한 층에 올라간다고 해도 차를 몰고 나갈  없었다. ”우리 어떡하죠?” 그녀가 이렇게 말했고, 나는 우리라는 1인칭 대명사에 그녀와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허물어진 듯하여 가슴이 설렜다. 영화에서 예기치 못한 일로 조난당한 남녀가 하룻밤을 같이 보내면서 커플로 거듭나지 않나. 삼류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데 때마침 홈플러스 관리직원이 나타나 산통을 깼다.  후로    만나 영화를 봤지만 우리들의 영화는 거기까지였다.


동창   명이 세이백화점에 주차했다고 하여 주차비 감면을 받을  백화점에 들어갔다. 무슨 영문인지 백화점은 개점휴업 상태 다름없었다. 문을 닫은 점포가  곳보다 많았다. 누군가 코로나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들이 온라인 쇼핑과 배달 음식에 익숙해진 탓에 오프라인 장사가 어려워진  같다고 했다. 오래전부터 유통 지형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기울고 있는 상황에서, 코로나 팬데믹이 마트와 백화점의 등을 떠밀었으리라. 세이도 홈플러스의 전철을 밟게 될까. 이곳에 함께 왔던 사람들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나중에 기사를 검색해보니 홈플러스 건물을 허문 자리에 40층 높이의 오피스텔 두 동이 들어설 예정이란다. 오피스텔은 홈플러스보다 몇 곱절 높을 테니까 탁 트인 시야를 즐길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은 셈이다. 나는 어떤 장소와 결부된 기억을 수직으로 그려 봤다. 훗날 2010년대 홈플러스 지층이라고 불릴지도 모를 이 땅에서 맺어진 인연들이 층층이 포개져 있었다. 마치 백악기 지층에 공룡의 기억이 봉인되어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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