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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호 Jul 12. 2022

오래 보아야 예쁘다

#첫차 #애정 #구관이명관 #인생

아직 차를 바꿀 생각이 없다고 말하지만 새 차를 보면 마음이 동하고야 만다. 매끈한 외관은 물론이고 어릴적 만화영화에서 봤을 법한 첨단 기능을 탑재한 내부를 둘러보면 당장이라도 지름신이 강령한다. 사무실 동료 직원의 신차 시승날은 그리 달갑지 않은데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억눌러야 해서다.


작년부터 회사 동료들이 유행처럼 차를 바꿨다. 한 분이 흰색 세단을 장만해 공을 쏘아 올리더니 두 분이 연달아 신차 대열에 합류했다. 모두 첫 차가 아니어서 그런지 더 크고 고급스럽고 비쌌다. 이렇게 주변에서 바람이 불면 제아무리 수도승 같은 마음을 먹어도 흔들리지 않을 재간이 없다. 한동안 릴레이가 주춤했다가 다시 바람이 불고 있다. 팀장님과 과장님이 신차 구매 예약을 했단다. 이제 사무실에서 헌 차를 타는 건 오직 나만 남게 된 것이다.


내 차는 2011년식 은색 아반떼이다. 올해로 12년 차로 사람으로 치면 어르신 대접을 받아야 할 나이다. 누군가 나더러 노인 학대하지 말고 새 차로 바꾸라고 했는데 답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요즈음 같은 고유가 시대에 기름을 많이 잡아먹고, 여기저기 긁히고 찌그러진 걸 제외하면 아직 잘 굴러가서다. 언젠가 후배는 차를 살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느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그럴듯한 답을 찾다가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기실 전연 틀린 말도 아니었다. 당장 차야 살 수 있겠지만 뒷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다.


일부 사람들은 내 아반떼를 중병에 걸린 노인 취급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세히 보면 좋은 구석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내 아반떼 장점을 밤새도록 열거할 수도 있지만 딱 세 가지만 꼽겠다.


첫째, 내 아반떼는 마음의 평화를 가르쳐 준다. 사실상 제로백 측정이 무의미할 만큼 순간 가속에 약하다. 액셀레이터를 힘껏 밟으면 덜덜거리는 소리가 나는데, 큰일을 치를까 봐 지레 겁먹고 발을 떼게 된다. 신호등이 주황불일 때 위력을 발휘한다. 보통의 운전자라면 갈지 말지 내적 갈등을 겪을 수 있다. 나는 고민 없이 브레이크를 밟는다. 어차피 빨간불로 바뀌기 전에 통과할 수 없어서다. 신호 위반 과태료를 내지 않는 건 덤이다. 혹여 도로에서 난폭 운전을 하는 무법자와 만나도 동요하지 않는다. 무법자와 나 사이의 격차를 좁힐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주로 2차선과 3차선을 애용한다.


둘째, 백 마디 말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게 낫다. 수 백 번 안전 운전을 외쳐도 한 귀로 듣고 흘리기 마련이다. 내 아반떼 여기저기에 난 상흔을 보면 절로 숙연해진다. 특히 오래전 후진을 하다가 담벼락에 들이박는 바람에 찌그러지고 긁힌 우측 후면 범퍼는 많은 걸 말해준다. 차에 오르기 전 말갈기를 쓰다듬듯 상처 난 범퍼를 손으로 쓴다. 오늘은 무리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사실 처음에는 주차하다 기둥에 조금이라도 긁히면 정비소에 맡겼다. 정비기사의 숙련된 손을 거친 차는 새것처럼 돌아왔다. 하지만 잘못한 기억도 흠집과 같이 지워졌다. 물론 흔적을 교훈으로 삼으려고 일부러 수리하지 않은 건 아니다. 진짜 의도야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다.


셋째, 내 아반떼는 추억 여행을 보내준다. 보통 출퇴근길에 차 안에서 노래를 듣는데 CD로 듣는다. 이제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CD플레이어가 장착되어 있어서다. 집안 장식장에 음악 CD가 빼곡히 쌓여 있다. 대부분 나이에 비해 조숙했던 형이 산 것이다. 퀸, 신승훈, 박효신 등의 앨범이다. 내가 용돈을 모아 샀던 조성모 3집 앨범도 끼어 있다. 거실장 한자리를 차지했던 오디오가 고장이 나 천덕꾸러기 신세였는데, 내 차 덕분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때 노래를 들으면서 그 시절을 추억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나태주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자세히 보아야 오래 보아야 예쁘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간에 애정을 갖고 자꾸 들여다보면 예쁜 구석 하나쯤은 발견할  있다.  아반떼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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