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습관 #집단
어떤 단어는 태어나 처음 보는 것처럼 생경하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도 도무지 입에 붙지 않아서다. 새해 벽두 신춘문예 당선 소감에서 발견한 '문우'가 그랬다. 당선자들은 으레 문우에게 제한된 지면을 기꺼이 할애했다. 한 당선자는 이렇게 적었다. '오랜 시간 고독한 글쓰기를 함께 해준 문우들'이라고. 내게 없는 걸 가진 그가 부러웠다. 나는 나지막하고 또렷하게 문, 우라고 읽었다. 읽는 맛이 좋았다. 그 말은 오래전 흙바닥을 함께 굴렀던 '전우'처럼 든든했다.
연초에 소설을 습작했다. 소설 습작은 꽤나 피로한 일이었다. 한 달 가까이 습작에 시간을 들이는 일도, 200자 원고지 80매를 읽는 일도 고역이었다. 이게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일기인지 아니면 그저 글자의 조합인 건지 나로선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스스로 등을 토닥였을 뿐. 남에게 보이기도 뭐했다. 사람들에게 보여 줘 봤자 비웃음만 사겠지. 서가에는 문학상을 받았거나 베스트셀러인 소설들이 즐비했으나 내게는 무용했다. 그때 내게 필요한 건 문우였으니까.
혼자선 나약한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 정복자가 된 비결은 집단생활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집단생활을 하면서 함께 어려운 문제를 해결했다는 거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제 몸집보다 예닐곱 배나 큰 매머드를 사냥하는 장면이 눈앞에 그려졌다. 문우들과 함께 쓴다면 언젠가 글이라는 산도 정복할 수 있겠지. 금방이라도 글솜씨가 늘 거 같았다. 그건 취업 준비 시절 스터디원처럼 달콤한 이름이었다.
4월부터 산문을 썼다. 용기를 내서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한 친구는 "이런 글 자주 좀 써 줘."라고 댓글을 달았고, 또 다른 친구는 "네 글을 읽고 글을 쓰고 싶어 졌다."라고 했다. 예전 직장 동료는 "글이 너무 좋아요."라고 남겼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글쓰기와 글 발표는 전혀 다른 일이었다. 에밀리 디킨슨처럼 사후에야 비로소 인정받고 싶은 게 아니라면 뭐든 공개하는 편이 나을 거 같다. 뜻밖의 피드백에 얼굴에 잔웃음이 번졌고 어깨가 와짝 올라갔다. 칭찬은 내일모레 마흔이 되는 아저씨를 계속 쓰게 만들었다.
얼마 후에는 고등학교 동창한테 연락이 왔다.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J였다. 이따금씩 만나서 밥을 먹는 사이였는데, 밥상에는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라든지 여자를 만나다가 잘 안 된 일 따위가 올랐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J는 짝사랑하는 여자애에게 발그레한 얼굴로 고백하듯 글을 쓴다고 말했다. 내 글을 보고 내면의 글쓰기 스위치가 켜진 모양이었다. 내가 아는 한에는 J는 영어 교사이자 학교 밖에선 영어 회화 모임을 이끄는 리더였다. 내심 국어와 영어가 부조화를 이뤘으나, 한편으로 영어 선생님의 '쓰밍아웃'이 반가웠다. 우리는 창작의 고통을 토로하고 글의 장점을 칭찬하고 서로를 응원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내게도 문우가 생긴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문득 대학, 취업, 결혼이 떠오르지만 염소웃음을 짓고 후보에서 지워 본다. 오래전 조상들이 맞닥뜨린 문제를 상상하는 건 아득한 일이다. 학자들은 호모 사피엔스들이 집단에서 쫓겨나는 일을 가장 두려워했단다. 동굴 밖에는 짐승들이 우글거렸기 때문이리라. 아마도 그 무렵부터 인간들의 DNA에는 혼자는 위험한 걸로 아로새겨졌던 모양이다. 역시 사람에게는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에게 좋은 자극을 받기도 하고, 좋은 사람과 밥 한끼를 먹으면 버석한 일상에 윤기가 흐르곤 하니까. 또 한편으론 사람 때문에 지지고 볶기도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