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자취 #소음
"집은 살아 봐야 알지 잠깐 봐서는 몰라."
분양받은 아파트에서 사계절을 산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오랜 명상 끝에 깨달음을 얻은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떠오른 건 오피스텔로 이사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걸레로 방 바닥을 훔치고 대자로 누워 있는데 정체불명의 진동이 방 안을 에워쌌다.
핸드폰은 진동 모드로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벽에 귀를 가까이 댔다. 텔레비전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음으로 현관문 앞 냉장고로 걸어갔다. 원래는 희었을 문짝이 누렇게 바래 있었다. 냉장고는 노인이 추위에 사시나무 떨듯 덜덜거렸지만, 아까 진동 소리와는 사뭇 달랐다. “냄새나지 말라고 환풍기를 24시간 켰어요.” 처음 방을 보러 온 날 화장실을 깨끗이 쓰셨다는 내 말에 세입자가 자랑하듯 대꾸한 게 떠올랐다. 화장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화장실은 신자들이 떠난 교회당처럼 정숙했다. 끝으로 보일러실 철문을 잡아당겼다. 모두 진동의 진원지가 아니었다.
지난달 방을 보러 다닐 때 핸드폰 나침반을 켜면 대개 북향이었다. 나는 모르고 폐가에 들어간 사람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보통 오피스텔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방이 배치돼 있었는데, 효율적이지만 인간적이지는 않았다. 남향의 세대수만큼 북향에서도 사람들이 산다는 말이니까. 한 번은 남향이라는 광고를 보고 곧장 부동산 중개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당장이라도 방을 보러 가려는 나를 중개사가 말렸다. 그는 고해성사를 하듯 속삭였다. "실은 창밖 바로 오른쪽에 벽이 있어서······."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나는 암구호를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사한 방은 세 가지 조건에 맞아떨어졌다. 해가 들어오고 좁지 않고 월세가 적당했다. 무엇보다 집 방향이 마음에 들었다. 방을 보러 간 날 부동산 중개사는 "사장님, 동향이에요."라고 속 시원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동시에 핸드폰 나침반을 켰다. 남동향이었다. 정확히 131도 남동향. 덤으로 사과라도 두어 개 더 받은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만만히 흘렀다. 방에 들어간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이사할 수 있는 날을 물었다.
이사하기 전에는 방을 알차게 채울 생각이었다. 인터넷에서 침대와 소파, 테이블 따위를 검색했다. 내 옆에 여자는 없지만 왠지 신혼부부의 설렘을 알 거 같기도 했다. 싱글 사이즈 침대와 라탄 라운지체어에 눈이 갔다. 큰 창으로 빛이 담뿍 쏟아지는 침대에서 일어나서, 남국의 정취가 물씬 나는 라탄 의자에 앉은 채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모습을 상상했다. 좁은 방 위에 흔한 아파트 광고가 겹쳐졌다. 왠지 격이 다른 사람이 될 거 같았다.
끝내 진동의 진원지를 발견하지 못한 채 방에 모로 누웠다. 이사를 하느라 진이 빠졌던 모양이다. 그러자 미세한 진동이 다시 귓전을 때렸다. 눈을 감고 있으니 감각이 한층 예민해졌다. 방 안에 더운 기운마저 감돌았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 순간 찬 공기와 함께 진동이 더 크게 다가왔다. 눈앞에는 오피스텔 건물보다 크고 높은 벽이 있었다. 얼마 전 새로 문을 열었다는 백화점이었다. 나는 범인을 추리하는 탐정처럼 백화점을 뚫어져라 직시했다. 백화점은 말이 없었다.
가느다랗고 비스듬한 창살이 수직으로 층층이 달린 창이 보였다. 루버 창이었다. 나는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수도자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필시 창 너머에는 수십 수백 대의 냉방장치 실외기가 있겠지. 백화점이 낯설게 보였다. 거대한 공룡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밤 9시면 백화점이 문을 닫는다는 것이었다. 평일에는 출근했다 밤늦게 돌아오니까 괜찮을 거 같았다. 문제는 주말이었다. 온종일 누워 있을 텐데 침대를 창에 붙여 놓을 수 없었다. 계획을 변경했다. 가구 구입 목록에서 침대를 지우고 나니 라탄 의자가 남았다. 1년 뒤 이삿날이 그려졌다. 원목으로 된 의자는 꽤 무겁고, 크기도 커서 내 차에 들어가지 않겠지. 용달차를 불러야 하는데 의자 하나 때문에 적잖은 돈을 쓰는 게 탐탁지 않았다.
결국에 아무것도 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아무것도 들이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다. 냉장고와 에어컨, 텔레비전과 붙박이장 등이 벽을 따라 방을 둘러싸고 있다. 최소한의 필요로 이뤄진 공간인 셈이다. 점심에서 커피를, 커피에서 크림을 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지만. 한편으로 가구를 들이지 않은 만큼 몸을 움직일 공간이 늘었다. 빈 공간을 팔 굽혀 펴기 같은 맨손 체조로 채우고 있다. 어쩌다 보니 방도 몸도 가벼워졌다. 역시 집은 살아 봐야 알지 잠깐 봐서는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