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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 Oct 14. 2021

제주일기 아홉번째 이야기

제주에서 적은 마지막 이야기 


제주에서 적은 마지막 글. 비공개였던 글을 풀어본다.





글을 오래 쉬었다. 글이 써지지 않았다. 요 며칠간 사고 체계가 완전히 고장난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 글이 제주를 떠나기 전 마지막 글이 될 수도 있겠다. 처음에 제주일기를 시작했을 때만 하더라도 제주를 담은 글을 적고 싶었다. 역시 마음먹은대로 되지 않는게 인생의 묘미겠지. 일부러 계획을 치밀하게 세우지 않는다. 어차피 그 계획들은 실현되지 않을 게 뻔하니깐.




소낭의 다락방





매일 새벽 수많은 꿈들을 꿨다. 그곳에서 나는 사람이었으며 귀신이었고, 남자였으며 여자였다. 사랑을 했으며 때로는 버림받았고, 아 맞다. 길은 매번 잃었지. 










수많은 악몽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결심을 해야만 해. 악몽이 곧 나라는. 매일 밤 잠들 때마다 악몽에게서 잠식되는 것이 아닌, 내가 곧 악몽이라는.




지금은 그리운 소낭.


제주에 와서 가장 많이 한 말은 시간은 참 변덕스러워. 제주에 온 첫날은 참 느렸다. 이 낯선 월정리에 내가 심겨질 수 있을까 걱정했다. 지금 제주의 시간은 너무나도 빠르다. 이제 제주에 있을 날이 7일밖에 남지 않았다. 월정리에 심겨져 무럭무럭 자라난 나를 보러 육지인들이 오기 시작했다. 제주의 나를 보러 육지인들이 비행기를 예매하기 시작한다.







삼 일 근무를 마치고 삼 일 휴무가 주어졌다. 이틀은 함덕, 하루는 월정리. 강의를 들으러 동쪽을 누비기.

함덕의 하늘은 분홍색이어서, 다른 생각들은 들지 않고. 하늘만 무작정 바라보기. 하늘만 바라보기 시합을 하면 내가 1등일 테야. 멍때리기는 누구보다 자신있으니깐.


휴무날 계속 함덕만 가는 것 같다면, 정답이다.

함덕의 배라





카페를 나오자마자 체리쥬빌레 사먹기. 원래는 전혀 먹지 않던 맛인데 자꾸만 먹게 된다.













너희들에게 줄 선물 사기. 함덕의 소품샵을 돌고 돌아 너희의 선물을 산다. 너희에게 줄 제주의 조각을 산다.





월정리의 책방





남은 시간 동안 월정리의 여러 공간들을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월정리의 책방에 앉아 글을 쓰는 중











매일밤 월정리의 바다 걷기



월정리의 밤바다






바다를 갔다. 어느 날은 한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다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나의 룸메이트 d와 영상통화를 한다. 서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d. 보고싶어 d 보고싶어 지민아 이제 곧 d의 곁으로간다. 내 인형들이 있는 곳으로 간다. 스물 두살 여름의 지민이 있는 곳으로 간다. 가을의 지민이 되어.






지민

모래에 지민을 쓴다. 그리고 너희의 이름을 쓴다.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너희의 이름을. 지나쳐가는 것들을 억지로 붙잡고 있지 말자 또다시 다짐하고. 물론 이런 다짐들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 또한 나 자신이 제일 잘 알지. 파도에 모래에 쓴 이름들이 지워진다. 나 역시 파도에 지워지고. 끝이없을 것만 같은 월정리의 해변을 걷는다. 이름이 지워진 채로.











나에게 주는 선물인 당근 삔




월정리에서 당근을 하나 가져왔다. 내가 제주에 있었다는 흔적이 되겠지. 


서울에서 당근 삔을 꽂은 나는 제주라는 꿈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방인. 

서울로 돌아간 나는 과연 어떻게 되는 걸까.





월정리에 내 흔적을 남겨놓고 있다

이제는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더이상 도망치지 않기. 도망치지 않는 사람이라고 큰소리쳤지만 매순간 나는 도망자였다. 수년간 나를 쫓아온 너를 마주보기로 한다. 끊임없이 너를 부정했으며 너에게서 벗어나고자 했다. 우리는 문 하나를 사이에 뒀지. 너는 부서져라 문을 두들겼고, 그런 네가 너무 무서운 나머지 두 눈을 감고. 두 귀를 막고. 그렇게 수년이 흘렀다. 이제 우린 서로를 마주 볼 시간이 됐다.





너를 받아들이고자 한다. 나는 너고 너는 나야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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