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 머릿속의 지우개>
우리 대학의 모든 교양들은 후마니타스 칼리지(약칭: 후마)에서 개설된다. 후마는 크게 필수 교양과 배분 이수로 나뉜다. 필수 교양은 말 그대로 무조건적으로 들어야 하는 교양을, 배분이수는 일정 수를 채워야 하는 교양을 말한다. 스무 살, 새터에서 처음 만난 선배들에게 물었다. 배분이수 지금 들어도 돼요? 선배들은 모두 말렸다. 지금 들으면 후회한다고. 그리고 나는 당연하게도 자신 있게 전공 수만큼의 배분을 담았다. 이미 결심한 것은 바꾸지 않는 그 성격 때문에. 배분에서 나는 다양한 과를 만날 수 있었으며 여러 이야기들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학점은 그 열정을 따라오지 못했다.
기초 교양과 배분이수. 교양들.
교양들 속의 스물, 스물하나의 지민을 찾으러 간다
대학에서 가장 처음 들은 수업은 기초교양이었다. 선배들은 교수님 k를 적극 2순위로 추천해주었다. 수강신청 날 1순위의 교수님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교수님 k를 신청했고, 성공하고야 만다. 대학에서의 첫날, 나는 무슨 옷을 입었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꿈틀거린다.
대학, 이제부터 나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며 나의 과는 나의 무엇을 대변하는가. 그리고 나는 누구를 만나게 되는 것일까.
겁먹지 마. 너는 너야
너는 너야. 겁먹지 말라고
애써 문장이 된 단어들은 자꾸만 입 안을 탈출하려고 애를 쓴다. 단어들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어금니를 꽉 깨문다. 그렇게 간신히 건물에 도착한다. 개강 날이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건물을 나가고 들어온다. 길게 눈을 감았다 뜬다. 수많은 인파 속 서 있는 나. 순식간에 공간은 전혀 알지 못하는 공간이 된다. 마치 우주 한가운데 미아가 된 것처럼. 손과 발은 굳고 만다. 귀는 멍멍해진다.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눈동자는 위아래로 모든 것을 담고자 애를 쓴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멈추었다. 나의 긴장이 시간을 멈추고야 만 것일까. 시각은 오전 10시경. 아직 해가 가장 높게 뜨지 않은 시간. 그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나는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이 낯선 공간 속에서 나를 지켜줄 새로운 문장을.
그때다.
딱-
찰나와 함께 멍멍했던 귀가 풀린다. 사람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건물을 나가고 들어온다. 멈춰있던 온몸의 감각들이 돌아온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강의실에 도착한다.
오, 나의 첫 교수님. 오, 마이 캡틴. 그렇게 교수님 k의 언어에 매료되고 만다.
k의 수업은 매일이 즐거웠다. 철학과 관련된 여러 지문들을 읽고 토론하는 것도 좋았으나, 토론 이전과 이후 해당 지문에 대해 설명해주는 k의 수업은 내가 정말로 대학에 왔다는 실감을 들게 했다. 알고 보니 k는 문학 평론가였다. 그는 알게 모르게 나의 문학관, 아니 더 나아가 나의 가치관을 형성했다. 저런 어른이 되고 싶다. 저런 시각을 가지고 싶다.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하면 저런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스무 살, 사랑에 빠지기 쉬운 나이.
이때 사랑의 대상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 성인이 되고 가장 먼저 사랑에 빠진 것은 k의 수업. 매주 월 수 12시부터 1시 15분. 배는 고프지 않았다. 그의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으니까. k의 시험은 논술. 공부는 따로 필요치 않았다. 매주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시험에 나왔으니까.
2학기, 결이 비슷한 기초교양을 또 들어야 했다. 아주 보기 좋게 k의 수업을 신청하지 못했고, 장문의 메일을 썼다. 지금 다시 읽어보면 그 메일은 러브레터 같다, 부끄럽게도. 나의 메일을 받은 k는 수강 인원을 증원한 권한이 자신에게 없다고 했다. 원하는 수업을 듣지 못하는 것만큼 슬픈 게 또 있었을까. 그때의 나는 학문, 솔직히 말하면 k의 언어에 목마른 상태였으며 좌절하고야 만다.
그 이후로 나는 졸업반에 이르기까지 k의 수업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그의 언어는 여전히 나를 이루는 일부가 되었다.
이전 회차에서 말했듯이 기숙사와 학교의 거리는 1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수정은 무려 원주에서 통학을 하고 있던 때였다. 희망과목 담기 날, 나의 눈에는 그리스 비극이 들어오고야 만다. 며칠에 걸쳐 수정을 설득했다. 그리고 끝내 수정은 5시 기상이라는 초 강수를 뒀다. 우리는 그렇게 그리스 비극을 듣게 된다.
신화는 언제 읽어도 신비로워. 신화에서 우리는 수많은 글감들을 찾게 되지. 우리는 그렇게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거야.
여러 기대를 안고 들어간 수업은 생각과는 조금 다른 수업이었다. 교수님은 철학 전공이었고, 수업은 신화보다는 철학 개념이 주가 되었다. 수업은 매일 다른 주제로 논쟁이 붙었고, 조그마한 새내기였던 수정과 나, 그리고 다른 동기는 중간 열에 앉아 가만히 그들의 불꽃 튀는 토론을 지켜보았다.
수업을 통해 희생양 혹은 악녀로 불렸던 여러 여성들을 만나곤 했다. 이피게네이아와 클리타임네스트라, 엘렉트레와 메데이아. 신화와 철학이 알려주지 않은 숨겨진 맥락 속에서 그들의 눈물을 읽었다. 그렇게 다시 한번 신화와 사랑에 빠졌다.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엘렉트라의 이야기를, 이피게네이아와 아르테미우스의 이야기를, 메데이아의 이야기를.
어릴 적 동화책으로 읽었던 내용들과는 또 다른 진실들이 나를 맞이했고 나는 기꺼이 그들의 슬픔과 분노, 그리고 보이지 않았던 수많은 감정들을 맞이했다.
1, 2 학년. 전공보다 더 많은 교양들을 듣곤 했다. 인가탐과 우사세를 통해 나는 정제 있게 글을 쓰는 법을, 흥분하지 않고 토론을 진행하는 법을 익혔다. 젠섹문을 통해 이유 있는 분노를 알았고, 르네상스를 통해 더 넓은 세계를 볼 수 있었다. 그리스 비극의 오이디푸스 신화는 훗날 논문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인도 신화의 수많은 글들은 글감이 되어주었으며, 빅문 과제를 위한 자연사 박물관 탐사는 꽤나 재미있는 경험이 됐다. (이번 글의 사진이 바로 자연사 박물관 내부이다.) 두 글쓰기 수업에서 적었던 서툰 문장 모음집은 지금의 문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교는 나에게 그리움이란 단어를 되새겨주게 된다. 그 수업에서 보이지 못했던 그 감정은 아쉬움이 되어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나를 찾아온다. 지금도 나는 그리워하고 있다. 그때 그 감정을 말하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중요한 것은 나의 대부분의 교양들엔 수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수정은 나와 함께 전공을 맞추었으며, 교양을 맞추었다. 수정은 항상 나의 의견을 따라주었고 우리는 그렇게 함께했다. 새로운 곳, 새로운 이들과의 만남 속 유일한 나의 것은 수정의 옆자리였다. 그 수많은 수업들 끝에 우리는 지금 졸업을 앞두고 있다. 수많은 사건들이 발생하고, 그 사건들은 항상 시련을 동반하겠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수정과 나는 함께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계속해서 글을 쓸 것이라는 것.
오늘 밤 나는.
여전히 가지고 있는 단어들을 엮고 또 엮어본다.
곧 맞이하게 될 새로운 공간 속 나를 지켜줄 새로운 문장을 만들기 위해.
* <교차로입니다 서행하세요>의 여섯 번째 글입니다. 이 매거진은 같지만 다른 점이 많은 두 친구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같은 주제에 대해 각기 다른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