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희 Oct 15. 2023

아빠의 꼬리  

도시 속 인어들 1

너희 아빠 너무 불쌍하지 않니. 엄마의 탄식이 시작된다. 아빠의 청년기를 생각했을 때 그다지 불쌍한 것 같지 않아 엄마의 말을 부정한다. 아니 그렇게 불쌍한 것 같지도 않은데. 그러자 엄마는 한숨을 내쉰다. 암에서 벗어난 것 같았는데 또 병이라니. 너희 아빠 너무 불쌍해. 진짜 불쌍한 삶이야. 불쌍해 불쌍해


불쌍해. 불쌍해. 불경을 외는 것만 같던 (엄마는 기독교 신자다) 엄마의 말이 그녀 자신을 향한 말 같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빠는 인어다. 아빠는 다리 대신 꼬리가 달렸다. 그래서 걷지 못한다. 항암 후유증과 파킨슨 증후군은 그에게서 걷는 행위를 앗아갔다. 우리 아빠는 인어가 맞다. 


항암을 하던 2021년, 2022년 동안 우리 집에서 침묵은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다. 항암 후유증으로 인해 아빠는 매일 밤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질러댔다. 아빠의 비명과 함께 밤이 시작되고 새벽이 왔다. 새벽 내내 우리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죽겠어. 죽을 것만 같아. 우린 지옥 속에서 살았다.


다리 좀 주물러줘.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아. 저려서 죽을 것만 같아. 그놈의 죽을 것만 같아. 우리는 아빠의 온몸을 주물렀다. 손이 아파 감각을 잃을 때쯤이면 아빠의 눈이 감겼다. 그러면 우리는 도둑고양이처럼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면 아빠의 눈은 귀신같이 떠졌다. 다시 주물러줘. 대안을 강구해보지 않은 것이 아니다. 안마기도 사봤고, 찜질도 해봤고 뭐 항암하러 갈 때마다 교수에게 호소했다. 저 고통을 어떻게 좀 해달라고. 하지만 모두 한시적이었다. 밤이 되면 다시 아빠의 비명이 시작됐고, 우리는 같이 울었다. 


어느 날은 아빠의 떼가 멈추질 않아서 새벽 2시까지 모두가 깨어 있었다. 제발 좀 살려줘 아빠가 발을 동동거리며 운다. 아니요. 주물러주지 않을 거예요. 어차피 끝이 없는 이 행위 속에서 난 반기를 들었다. 그러자 아빠의 울음이 거세진다. 저 주름진 눈엔 눈물이 맺혀있지 않음을 안다. 아빠는 그저 단어 그대로 '우는 것'뿐이다. 아빠가 다섯 살이 됐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바닥에서 앙앙거리며 우는 아빠를 지나친다. 아빠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줄까? 난 핸드폰을 들어 그를 담는다. 제발 좀 그런 것좀 찍지 말라고 했지. 엄마의 성화에도 난 꿋꿋하게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지나간 항암이라고 생각했는데. 걷지 못하는 것도, 다리가 불편한 것도, 그래서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것도 모두 항암 후유증이라고 생각했는데 파킨슨이라니. 그것도 병이 아니라 약효도 들지 않는 파킨슨 증후군이라니. 나 혼자 간 병원에서 그런 진단을 듣는다는 것은 꽤나 공포스러운 경험이다. 이젠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어떻게 이겨낸 암인데 파킨슨까지 닥치다니. 아빠는 영영 걸을 수 없는 것일까. 정말로 아빠는 아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수많은 의문들이 머릿속을 침범한다. 하지만 의문들은 하나의 갈래로 모아진다. 어차피 일은 벌어졌고 답은 없다. 다시 지옥이다. 


파킨슨 증후군 첫날, 우리 가족은 반성회를 가졌다. 반성의 시간. 이른바 반성회. 아빠 걸음 수 제대로 안 채웠다고 구박해서 미안해요. 계속 까먹는다고 뭐라해서 미안해요. 미안해요 아빠 전부 다.  


인어공주가 사람의 다리를 얻어 뭍으로 올라왔을 때를 생각해보자면,

다리를 처음 얻어 걷는 것도 불편했고. 

목소리가 없어 말을 하지도 못했지.


반대로 생각해보는 것이다. 아빠는 인어가 되어가고 있다. 다리 대신 꼬리가 생기고 있는 중이다. 인어의 언어를 익히느라 사람의 언어를 까먹기 시작한 것이다. 아빠의 꼬리가 다 자랄 때까지 아빠를 기다려줘야해. 기다려줘야만 해.



매거진의 이전글 도시 속 인어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