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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요가 수행자 Dec 19. 2022

퇴원하면 괜찮을 줄 알았지

코로나에서 버틴 임신, 출산, 육아의 시간들

퇴원하면 괜찮을 줄 알았지만 그건 천만의 말씀이었다. 퇴원한 다음 날, 바로 앞 사거리에 가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배가 묵직하고 조금만 걸어도 배가 당기고 아팠다. 왜 그러지 하고 벤치에 앉아서 쉬어가면서 걸었는데 집으로 돌아올 땐 더 심해져서 숨이 차고 도저히 걸음을 걸을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배가 딱딱하게 수축됐다 풀리기를 반복했다. 잠을 청했지만 세기는 더욱 세졌다. 당장 혼자서는 병원에 갈 수도 없어서 밤늦게 퇴근하는 신랑을 기다렸다가 병원에 전화했다. 자정이 넘은 새벽 텅 빈 도로를 운전해서 산부인과로 가려니 별생각이 다 들었다. 병원에는 당직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은 배의 진통 주기를 보면서 약을 투여했다.


“언제부터 그랬어요?”

“9시쯤이요?”

“한참 전인데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선생님은 배의 멍을 보더니 아마 겉에만 이렇게 멍든 게 아니고 자궁 속까지 멍이 들었을 거라고 했다. 나는 담당 선생님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당직 선생님의 말을 듣고 이렇게 아픈데 카페까지 걸어갔던 건가 하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선생님마다 생각하고 거기에 대응하는 것도 천차만별이었다.


해피는 임신 초기부터 지금까지 쭉 튼튼하게 자랐기에 진료실에서 별다른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때는 몰랐다. 우리 담당 선생님이 웬만한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걸.


딱 한 번의 외출 때문에 병원에 다시 입원했다. 밤만 되면 배가 쪼그라들 듯이 당겼다. 혼자 가만히 누워 진통 간격을 체크하다 불안하면 인터폰으로 간호사에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기계를 붙여놓고 관찰해도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담당 선생님은 수축이 오지만 자궁경부가 튼튼해서 조기 진통은 아니니 괜찮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정형외과에서 받은 진단서로 쓴 병가가 끝나가는 것이었다. 사고가 났던 그 길을 다시 운전해서 출퇴근하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무거운 수업 바구니를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마스크를 쓰고 산소부족으로 헉헉거리며 수업을 하는 것도 정말 무리였다.


나는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찾아 학교를 가지 않고 쉴 생각을 했다. 파견 교사라 육아휴직을 앞당겨 쓸 수는 없었고 출산휴가를 최대한 당겨 쓰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출산휴가에 아껴뒀던 연가를 전부 써도 학교에 가지 않으려면 2주간의 병가가 더 필요했다.


다시 입원했으니 당연히 산부인과에서 진단서를 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담당 선생님은 단호하게 ‘쓸 수 있는 진단명이 없다’라고 했다. 입원하긴 했지만 경부 길이가 길어서 조기 진통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진단서만 기다리고 있던 나는 믿었던 동아줄을 놓쳐버린 것 같았다.


“퇴원하고 돌아가서 일하는 게 누워만 있는 것보다 아기한테도 더 좋아요.”

“아니, 제가 집 앞에 나갔다가 다시 입원했는데 어떻게 학교에 가요?”


 선생님이 정말 야멸차게 미웠다. 진단서를 끊어줄 수 없는 이유야 있겠지만 아직 다 낫지 않았는데 돌아가서 일하라는 게 너무 속상했다. 진료가 다 끝났는데도 징징대다가 그러면 소견서라도 작성해 달라고 사정을 했다. 소견서로 병가는 쓸 수 없지만 연가를 쓰는 근거 정도는 될 수 있었다.




멍은 여러 날이 지나도 시뻘건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사고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배는 점점 불러왔고 움직임은 둔했다. 밖에는 코로나가 하루가 다르게 심해지고 있었다.      


병실로 올라와서 참았던 서러움을 터뜨렸다.  문을 닫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얼굴이 팅팅 부을 때까지 울어도 말리는 이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한번 울어볼 걸 그랬다. 처량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을 테지만 무엇이 중한가.


다시 입원하는 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나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앞으로는 운전도 일도 안 하고, 그저 아기가 잘 태어나도록 최선을 다할 거다.


혼자 연신 눈물을 닦아대다가 문득 내가 전화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바로 중학교 친구 보라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보라는 내 이야기를 들어줄 것 같았다.


“보라야.”

"왜, 미진아 무슨 일이야?"


훌쩍거리는 걸 멈춘 뒤에 전화를 걸었지만 다시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보라는 내 친구 중에 가장 일찍 결혼한 친구였다. 우리는 모두 언제 무엇을 하다가 보라의 결혼 소식을 알게 되었는지 기억하고 있다. 21살이었고 날이 따뜻했다. 나는 학교 근처에서 혼자 걷다가 다리 위를 지나칠 때쯤 전화를 받았다.


친구들과 중앙시장 닭갈비 집에 모여서 남편이 될 사람과 식사를 했다. 참으로 어렸던 신부와 신부 친구들은 그런 자리가 처음이었다.


나에게 결혼은 아직 멀고도 먼 이야기였지만 보라는 곧 식을 올렸다. 그리고 20대의 전체를 아이 셋을 키워내며 보냈다. 당시에는 그게 어떤 삶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참 힘들었겠다는 정도였다.


보라는 내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담당 선생님이 너무했다고 같이 욕도 해줬다. 첫째 때는 조기 진통이 와서 몇 주 동안 누워만 있었다고 했다. 입원해서 혼자 누워있는 게 얼마나 힘들고 지루하고 불편했는지 링거때문에 머리도 못 감았다고 함께 투덜댔다. 셋째 때는 자기도 임신 중에 교통사고가 났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는 양수 속에 있다가 건강히 잘 태어났으니 걱정하지 말라고도 했다.




나는 보드랍고 연한 속살을 다 드러냈다. 한 시간도 넘게 통화를 하고 전화를 끊었을 때는 마음도 차분하게 정리된 느낌이었다. 속상하고 서러운 감정들이 가라앉자 비로소 똑바로 생각할 수 있었다.


여기서는 진단서를 끊을 수 없지만 다른 병원에서는 가능할 수도 있었다. 이런 고민을 어머님께 말씀드렸더니 어머님은 흔쾌히 자기가 잘 아는 병원이 있으니 그쪽으로 가면 될 거라고 했다.


산부인과에서 퇴원하자마자 시어머니와 함께 진단서를 끊어줄 만한 정형외과를 방문했다. 생각보다 손쉽게 2주의 추가 진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병가 4주와 연가와 출산휴가를 이어 붙이니 기적처럼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한시름 놓는 순간이었다.     




그제야 나는 아이들에게 인사도 못 하고 갑작스럽게 학교생활을 정리하게 된 것이 아쉬웠다. 교통사고가 나서 못 온다는 연락을 마지막으로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정규수업도 방과 후도 모두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 나에게 학교 오지 말라고 이야기했던 그 아이에게도 장난스럽게 말 한번 건넬 수 없었다.      


*사진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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