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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요가 수행자 Dec 18. 2022

드라마 산후조리원과 입원 생활

코로나에서 버틴 임신, 출산, 육아의 시간들

멍은 시간이 지날수록 올라왔다. 허벅지 안쪽과 배 아래쪽이 시퍼레지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붉게 올라와 피멍이 들었다. 하루에 세 번 아기 심박수를 재러 오는 간호사들이 배를 걷어보고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아, 제가 교통사고가 나서요.”     


이렇게 말을 하면 간호사들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어쩌다가 교통사고가 났는지 물었고 그러면 나는 졸음운전을 해서 앞 차를 박았다는 말까지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병원에 입원하는 게 백번 맞는 일이었다. 시간이 되면 침대로 밥을 가져다줬고 화장실 가는 일을 빼놓고 한 발짝도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다리가 아파서 어디도 갈 수 없는 나에게 입원 생활은 최고의 환경을 제공했다. 침대는 리클라이너처럼 리모컨이 있어서 누운 채로 등받이를 세워 안거나 다리를 올릴 수 있었다. 게다가 어떤 성분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링거를 맞고 나니 무섭게 부어올랐던 몸의 부기도 서서히 빠졌다.  

   



산부인과 입원이 가장 좋았던 것은 하루 3번 아기 심박수를 직접 들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아기 심박수를 들을 때마다 아기는 괜찮을 거라고 주문을 걸었다.


아기는 사고 직후에는 움직임이 덜 했다가 며칠이 지나니 본래의 움직임을 되찾았다. 그리고 나서는 하루에 3번이나 심박수를 재는 게 성가셨는지 간호사가 기계로 배를 꾹 누르면 그 부분을 발로 뻥뻥 걷어찼다.


간호사들은 대체로 친절했고 누워만 있으라고 신신당부했다. 정말 마음껏 누워있을 수 있었다. 입원 생활을 하는 동안 넷플릭스를 참 많이 봤다. 내가 심정이 불안하고 우울해서 그랬는지 죄다 우울한 것들이었다. 드라마 ‘퀸스 갬빗’을 재미있게 봤고 그다음에는 볼 게 없어서 이것저것 찾다가 살인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외국 다큐멘터리도 봤다. 아무도 없는 낮에는 뭐든 볼 수 있었다.      




임신 중 교통사고가 났다는 소식은 모두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소식을 들은 엄마 아빠는 강원도에서 인천까지 달려왔다. 코로나 때문에 보호자는 딱 한 명만 목걸이를 걸고 입원실에 올 수 있었다. 가족들이 문병을 왔을 때도 담담하게 맞이하려고 했다. 내가 울면 아기는 정말 잘못되어버릴 것 같았다.


아빠와 둘이 병실에 남겨지기도 했다. 아빠와 단둘이 남겨진 건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인 것처럼 어색하게 느껴졌다.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아빠에게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먹으라고 했다.


나는 교복을 입고 아빠에게 바락바락 대들던 어린애가 아니었고 배부른 임신부였으며 교통사고까지 낸 뒤 꼼짝없이 누워 있는 처지였다. 아빠도 이런 상황이 처음이고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빠는 나에게 먼저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그 말이 정확히 어땠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놀랬지. 고생했다.’ 뭐 그런 비슷한 말이었는데 금방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눈물을 보였다. 아직 아기를 낳지도 않았고 엄마가 되지도 않았지만 너무 커버렸다고 느꼈는지 모르겠다. 나는 괜한 감정에 휩쓸리기 싫어서 그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족들이 돌아가고 혼자 병실에 남자, 병원 생활이 익숙해지고 마음도 안정되면서 다시 글을 쓸 수 있었다. 배가 무겁고 아직 회복이 안돼서 앉아서 노트북으로 글을 쓸 수 없어 침대에 누운 채로 공책에 글을 썼다.


누운 채로 글을 쓰면 잉크가 쏠려서 펜이 안나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볼펜을 거꾸로 들고 쓰면 처음에는 잘 나오다가도 곧 잉크가 끊기고 말았다. 남동생은 내가 없는 집을 지키다가 심부름을 시키면 종종 병원으로 와서 필요한 물건을 전달해 주었다. 주로 핸드폰 충전기 연필과 연필깎이 같은 자잘한 물건들이었다.


신랑은 입원해 있는 나보다 이 생활을 더 힘들어했다. 퇴근하고 병실에 왔지만 딱히 잘 수 있는 공간이 없어서 곧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고 나면 집에서 혼자 있는 게 얼마나 쓸쓸한지 나에게 하소연을 하면서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다행히 바로 이때 운명처럼 우리가 함께 시간을 내 볼만한 드라마가 나왔다. 바로 드라마 ‘산후조리원’이었다. 의학 드라마가 아닌 본격 산후조리 드라마.


신랑과 함께 드라마 산후조리원을 보면서 깔깔대며 웃었다. 우리는 공간적으로 드라마에 훨씬 감정 이입을 잘할 수 있었다. 여기가 바로 산부인과이고 저녁으로는 미역국이 나왔으며 옆방에는 갓 아기를 낳은 엄마들이 입원해 있으니 말이다.


출산의 모든 것을 미리 체험해 보는 것처럼 몰입해서 드라마를 봤다. 진통의 순간부터 아기가 나오기까지. 그리고 아기가 나온 뒤에 조리원으로 옮기며 겪게 되는 에피소드도 너무나 재미있었다.


드라마를 보고 아기를 낳는 것이 해볼 만한 일이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세세한 감정까지야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아기가 건강히 아프지 않고 태어난다면 그 밖의 다른 것은 바라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신랑은 쉬는 날이면 병원에 와서 같이 밥을 먹었다. 산부인과 식사는 미역국이 하루에 두 번 매일같이 나왔는데 신랑은 그 미역국이 맛있다면서 자기는 산후조리원에 올라가도 미역국만 있으면 괜찮다고 했다.


드라마에서는 산후조리원에 들어간 엄마들이 호텔 쉐프들이 준비한 식사를 하는 반면 남편에게는 토스트와 두 장과 일회용 잼 하나가 제공됐다. 아빠들이 몰래 고물상 같은 허름한 육개장집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장면은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이다.



이번에 넷째를 낳아 네 번째 조리원에 온 다둥이 아빠 준석이 이제 막 초보 아빠가 된 도윤을 앞에 놓고 아이들 사진을 보여준다. 아이들을 보는 두 아빠의 얼굴이 행복하다. 사진을 보는 중에 잘생긴 청년 사진이 나온다.


“그럼 이분은 첫째 아드님이세요?”

“아니, 이건 날세.”



애 넷 키우다 보면 다 이렇게 되는 거지. 하지만 나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네. 왜 행복한데 왜 눈물이 나지.


허허허. 드라마를 보며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후 주말이 지났고 의사 선생님은 이제 퇴원해도 된다고 하셨다.      


*사진 : 드라마 산후조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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