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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션에 가야 하는 사람은 그 애가 아니라 '나'였다.

나의 숨은 욕망 찾기

사람마다 숨어있는 욕망이 있다. 욕망을 꼭꼭 숨겨버린 이유는 냉혹한 현실 때문일 수도 있고 몇 번의 실패로 재능이 없다고 판단해 버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욕망은 죽지 않는다. 구석에서 여전히 숨 쉬고 있다.


몇 년에 걸쳐 쓰려던 소설에서, 주인공의 꿈은 오디션장으로 향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예술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가기 위해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길을 떠난다. 인생을 걸고 그리로 간다.




예술학교에 입학하고 싶었던 것도, 노래를 부르고 싶었던 것도. 사실 나의 꿈이었다. 숨겨지고 억눌러진 꿈. 그 꿈을 내 글의 주인공에게 던져 준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오디션장에서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은 그 애가 아니라 '나'였다.


못 간 길을 걸어보라고 아이를 재촉하는 부모처럼, 내가 못 가본 길을 가보라고 소설 속 주인공을 떠 밀고 있었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알지 못한 채.




기적처럼 뮤지컬 1차 서류전형에 붙었고, 2차 대면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문자를 받았다. 장소는 제주아트센터. 아침에 결연한 마음으로 운전을 해서 그곳으로 향했다.


목록에 내 이름이 있고, 내 이름이 적힌 이름표가 있다. 정말로 이곳에 오디션을 보러 온 것이다.



이곳에 모인 19명의 사람들은 전부 배우일까? 주변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이렇게 평범하게 앉아있는 사람들이 배우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연출, 기획, 안무, 작가 선생님들이 오시고 연습실에서 본격적으로 안무를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거울을 앞에 두고 춤을 춘다. 예전의 나는 거울 앞에서 뻣뻣하고 어색하기만 했지만 지금의 나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세상에, 내가 춤이란 걸 출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경험들이 새롭고 신기하게만 느껴진다. 이런 세계가 있었다고? 모르던 세상의 커튼을 살짝 열고 들어간 느낌이다.


하루를 즐기겠다는 마음으로 오디션장에 향했지만 떨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외워놓은 가사도 대사도 자꾸 하얘지면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앞 번호여서 다행이지 뒷 번호였다면 숨을 쉴 수나 있었을까 생각이 든다.




오디션장으로 들어가는 내가 있다. 심사위원 4명이 앞에 있고 나는 거울을 마주하고 자리에 선다. 최선을 다 했지만 아무래도 이래 가지고 될까 싶다.


오디션 장에서 에너지를 모두 쏟아부었고 기진맥진해서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홀가분하게. 왜 집에 가는 길에 노래가 나오는 것일까. 오디션장에서 노래를 좀 그렇게 불러보지.





마침내 발표날. 오디션을 보라고 말해주었던 지인과 밥을 먹으러 제주시로 갔다.


평화로를 타고 가는 동안 이미 문자는 와 있는데, 열어보기가 싫어서 그대로 운전을 했다. 발표가 났는데 봉투를 열지 않고 운전을 한 것이다.


마침내 빨간 불에 걸려서 문자를 여니 '예비 합격'이라는 애매한 결과가 나왔다. 합격도 탈락도 아닌 예비합격. 긴장했던 마음에 맥이 풀려버렸다.




소설 속 주인공이 예술학교 오디션에 붙을까. 그 결과는 비밀로 하려고 했다. 결과가 어찌 되었던 도전한 네가, 여기까지 온 네가 중요해.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오디션을 보니 결과도 참 중요하다. 오디션에 붙으면 커튼으로 살짝 엿본 그 안으로 들어가 선생님들 사이에서 계속 연기, 노래, 춤을 배울 수 있다. 오디션에 떨어지면 다시 바깥으로 나와야 한다. 그곳에는 연기, 노래, 춤 선생님이 없다.


여기에서 마음을 덮자니, 구석에서 끌어올려 꺼내놓은 욕망을 다시 집어넣을 수가 없다. 꿈틀거리는 욕망의 거대한 구렁이를 집어넣을 수가 없다.




그날 밤 꿈을 꾸었다.


뱀 요리 앞에 있었다. 거대한 구렁이는 이미 죽었다. 나는 생선 한 토막을 받듯이 뱀 한 토막을 접시에 담아 받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요리사의 손이 뱀을 한 조각 더 썰었고 죽은 뱀이 꿈틀거렸다. 꼬리가 오그라 들어 살아 움직였다. 머리가 꿈틀대며 눈을 떴다. 뱀은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 살아있었다.




노래가 참 좋았다. 초등학교, 아니 유치원 때부터 그랬다. 하지만 어디든 손을 내밀면 자꾸 미끄러지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노래를 못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해 보기도 전에 숨어버린 것이다.


오랜만에 다시 노래 연습을 했다. 내 노래는 부족하다. 노래뿐만이 아니다. 연기도 2017년 이후에는 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예전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다. 겨우 커튼을 열어 안을 봤는데 예전처럼 살라고 하면 그렇게는 못하겠다.


욕망은 죽지 않았다. 여전히 살아있다. 그게 죽도록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에게도 그런 뱀 한 마리가 있을지 모른다.


오래전에 구석에 내 팽개쳐버린 욕망의 뱀. 죽은 줄 알았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뱀. 부디 그 욕망이 당신의 슬픈 그림자가 되지 않기를. 당당한 자신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사진: UnsplashAnthony L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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