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Aug 05. 2020

나의 습작들의 기억

[나를 나답게]위태롭던 삶을 지탱하는 사소한 메모의 습관


꽃다운 20살, 나는 엄청난 뚱보였다.


안 좋은 일들이 겹친 탓에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잃어버리고,

나의 존재마저 지워가던 그때,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던 내게 이기적이었던 운명의 순간들,
도망치는 것조차 두려워서 그 자리에 선 채 말라죽어가던 시절이 있었다.


아무것도 주어진 것이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하루의 감정들을 기록하는 일뿐,
쌓아 놓은 슬픔 사이의 글 하나를 발견하여,

 처음으로 소설을 썼고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인생은 드라마가 아닌 것처럼,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매년 신춘문예에 떨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때 생긴 습관 덕분에,
매일 밤마다 책상에 앉아서 쓰기 시작했다.
때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낙서도 있고 윤곽조차 애매한 추상적인 형태도 있었다.
메모가 쌓여 갈수록 어설펐던 나의 존재가 뚜렷해지고 선명해졌다.
어디론가 향할 수 없던 분노로 가득 찼던 글이,
점점 시야가 확장되어,
글의 맥락을 잇기 시작했고,
슬픔과 우울감의 젖어버린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마다 화장실 거울에서 마주하는 뚱뚱한 나는,
비만으로 인한 당뇨와 고혈압으로 망가진 상태였다.
 
변화를 바라는 작은 소망을 메모에 적었고,
메모는 식이요법과 운동에 대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밤마다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정해진 시간에 식사량을 조절하는 것만으로,
6개월 안에 15kg 가까이 빠지자 몸이 가볍고 건강 해졌다.


우울감에서 벗어나 작은 성취감이 주는 설렌 감정들이 내일을 꿈꾸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책상 앞 벽면 한가운데 내가 되고 싶은 이상향을 적어 붙인 후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남들보다 늦게 들어간 대학교도 졸업하고,
자격증 취득하여 취업도 하고,
파견직과 계약직과 정규직을 지나 구조조정을 겪는 순간까지,
인생이 흔들릴 때마다,
묵묵한 하루의 메모가 내 삶을 지탱해 주었다.
 
내 잘못이 아님을,
인생이 그러함을,
무슨 일이든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고,
의연해지고 성숙해졌다.
 
소설가는 되지 못했지만
하루의 습관이 쌓이고 쌓여서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풍파 속에서 내 자신이 한없이 초라 해져서 주저앉고 싶을 때면,
그동안 써 놓은 글귀들을 찾아본다.
 
예전처럼 스스로를 버려두지 않겠다는 의지,
절대 이런 일로 무너지지 않겠다는 다짐,
나는 모든 것이 잘 될 거라는 믿음,
 
오늘 저녁도 나는 책상 위에 앉아서 나를 쓴다.

매거진의 이전글 위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