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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Oct 01. 2024

1. 빨간 하이힐

나는 빨간 하이힐을 또닥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팔꿈치에 달린 명품 가방, 손에 들린 청첩장에 적힌 주소를 확인하면서 주변의 간판을 눈으로 스캔한다. 풍선과 리본으로 치장한 웨딩카가 정차된, 웨딩홀 앞은 하객과 관계자로 북적거린다. 자동차에 오른 따끈따끈한 부부를 향해 마중 나온 가족들은 잘 가라며 손을 흔든다. 떠나가는 자와 남는 자의 무리를 피하며 간신히 계단을 오른다. 계단 위에서는 결혼 행진곡이 흘러나온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내리자, 대리석에는 한껏 치장한 내가 반사되어 비친다. 그 옆에는 어디서 왔는지 이름표가 적힌 화한들이 일렬로 나열되어 있다. 회사이름, 학교 이름, 군대 명칭, 조기축구회도 보인다. 친구들이 '이젠 밤에 전화하지 마라.', '화환 두 번하게 하지마라' 등 익살스러운 문구를 내건 화한들이 그들 사이에 숨어있다. 

축의금을 내는 탁자 앞에 신부의 부모님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나와서 인사를 건넨다. 생전 처음 본 부모님께 어설프게 인사를 받아내고 축의금을 전달한다. 지영이의 오빠로 보이는 남자에게서 식권을 받는 내내 아버지의 지인들의 방문으로 나의 뒤통수가 시끄럽다. 


인사치레가 한참인 신부대기실에는 신부 지인들이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여자들 네 명이서 신부를 사이에 두고 얼굴 작아 보이는 각도 경쟁에 열심이다. 그녀들이 비켜나간 자리에 나를 발견한 화사한 신부 지영이가 손짓한다. 

-연주야 이리와 사진 찍자. 

셔터가 눌리는 소리, 그녀 옆에서 오늘 결혼식에 왔다는 확인 도장을 찍는다. 

-정말 예쁘다.

-새삼스럽게, 맨 날 예뻤지~, 와줘서 고마워~, 너 결혼식 언제지?

-아직, 상견례 안 했어, 이번 년도 안에 결혼해야지.

-청첩장 나오면 밥 사~ 

-응, 알았어.

친척으로 보이는 한복 입은 아주머니 무리들이 다가와 나와 지영의 사이를 가른다. 지영이의 손을 잡으며 잘 살라는 축복의 언사를 더하는 그들을 피해, 북새통이 된 신부 대기실에서 벗어나자 전화 벨소리가 들린다. 핸드폰 액정에는 남자친구인 준호가 표시된다.

-결혼식장에 도착했어. 어디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식장 앞 로비에서도 그가 눈에 들어온다. 훤칠한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 친구들 사이에서 날 부러움의 대상으로 만든 나의 사람이다.

사람들을 헤치며, 살금살금 걸어가 까치발을 들고 그의 눈을 가린다.

-누구게?

-음, 글쎄 누굴까요?

뻔히 아는 답인데도 나와 그는 애꿎은 깨를 볶는다.

-맞춰봐~

그는 내 손을 잡아 내린 후, 몸을 빙그르르 돌려서 나와 눈을 마주치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여전히 달달하게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 

예식장의 불이 꺼지고 식의 시작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들린다. 로비에 흩뿌려진 사람들도 일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간다. 자리가 부족한 탓에 맨 뒷자리에서 준호와 서서 결혼 행진곡을 듣는다. 신랑이 친구들의 환호성 속에 큰 보폭으로 걸어간다. 신랑이 단상 앞에서 신부를 기다리고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지영은 아버지의 팔꿈치의 팔을 끼고 한걸음씩 뗀다. 지영이보다 키가 작고 왜소한 지영이 아버지는 딸의 보폭을 맞추며 드레스를 밟지 않도록 조심히 걸어간다. 아버지와 딸이 같이 걸어가는 그 길, 마음이 애달프다.


-어, 너~ 연주 아니야?

나의 이름에 뒤돌아보니 대학교 때 이름만 아는 친구 소영이가 아는 척을 한다.

-계집애, 몰라보게 예뻐졌다. 못 알아볼 뻔했어. 그리고 보니 너 쌍커풀 수술했구나~

-어~ 아냐~ 네가 몰라서 그렇지, 나 원래 쌍커풀 있었어, 너도 예뻐졌네.

-예쁘긴 이젠 아줌마 다 됐지, 옆에 계신 분은 남자친구?

-응.

서로 어색하게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인사하는 내내, 소영은 빠르게 준호를 스캔한다. 맘에 들었는지 내 어깨를 치며 호들갑이다.

-훈남이시네, 직장은 어디에요?

준호는 훅 들어오는 질문에도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다.

-같은 직장 다녀요. 

-어머 너 대기업에 다니잖아, 사내 커플이야?

나와 준호는 마주보며 쑥스러워하자, 못마땅했는지 소영은 다시 훅 펀치를 날린다.

-언제 결혼하는데?

-이번 년도 안에 해야지.

-얼른 해~ 집은 구했어?

-그냥, 남자친구 사는데 같이 살려고

-오피스텔 같은데 말고 아파트에서 시작해야지, 요즘 집값 장난 아니더라, 돈은 많이 모았고?

-그럭저럭~

-그럭저럭 모으면 안 되지, 대출받아서 생활하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 매달 돌아오는 원금 이자 상환에 매일 집 값 떨어질까 봐 걱정되고, 이럴 줄 알았으면 전세로 집장만 하는 건데 괜히 집을 샀어.

애매한 자랑거리에도 거드름 피우며 잘난 척하는 소영은 변함이 없이 한결 같다. 지영은 호들갑을 떤다.

-그리고 보면 지영이는 부모님 잘 만났어. 지영이는 아버지가 집 사줬데~ 신랑이 장인어른이라면 끔찍하게 공경한다고 하더라.

-그렇구나.

화면 스크린으로 지영이 손을 신랑에게 건네주는 지영이 아버지가 눈에 들어온다. 아버지라는 단어 입안 오물거리다가 내뱉지 못하고 삼킨다. 마음 한구석이 허하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건 10년 전이다. 겨울이었는지, 가을이었는지, 추웠는지, 더웠는지 기억이 가물거린다. 검은색 잠바를 걸쳤던 거 같고 아니면 남색 반팔티를 입으셨던 것도 같다. 기억나는 건 아버지와 마주보고 아침을 먹었다는 것과 속이 안 좋다며 밥공기를 비우시지 못하셨던 것, 그날도 아버지는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하신다며 집 문을 나섰다. 철문이 부딪치며 마모되는 소리와 함께 기억의 문이 닫혔다.


-연주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준호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주위를 둘러보니 소영이는 자취를 감췄다. 귓가에는 신랑 신부가 지금까지 키워준 양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린다. 신랑이 신부 부모님께 큰절을 올리자 하객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이미 결혼식장에 몰입된 준호는 신랑이 고개를 들자 따라서 몸을 움직인다.

-우리도 결혼하면 좋겠다.

-네!

-나도 결혼식장에 너 네 부모님께 큰절 할 거야.

-고마워요.

말을 내 뱉는 내내, 나의 시선은 지영이의 아버지에게로 향한다. 사위에게 다가가 주름진 손으로 연신 사위의 손을 쓰다듬는 장면이 스크린에 확대되고 미세하게 전파되는 음성은 딸을 잘 부탁한다는 당부가 담겨 있다. 옆에서 바라보던 남자친구가 부러워한다.

-나도 아버님이랑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아버님 취미가 뭐라고 했지?

-어? 어...... 아마......

-뭐 특별한 거 없으셔?

며칠 전 신문에서 본 중년남자들의 여가 활동 순위를 떠올린다. 

-아 맞다, 낚시 좋아하셔요.

-그래? 나도 낚시 좀 배워 볼까? 

그가 물가에 걸린 낚싯대 줄을 감는 시늉을 하며 웃는다. 나는 태연하게 웃으며, 기억도 나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보단, 이 거짓말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하다.

식권을 두 장을 내고 식당 안으로 들어간다. 결혼식의 필수 코스인 뷔페에서 한 접시를 채우는 내내 대학교 때 알고 지낸 몇 명의 친구들을 만난다. 다들 언제 결혼 하냐는 물음으로 인사를 시작해서 미래 남자가 얼마나 명품백을 잘 사줄지에 대한 답으로 끝난다. 힘겨루기 만남을 끝내고 자리에 앉아서 음식을 먹을 찰나 소영이 아이들과 남편을 데리고 내 옆에 앉는다. 

-우리 남편이야

고개 끄덕임으로 가볍게 인사한다.

-얘는 연주, 연주 애인

-안녕하세요.

서로의 인사치레가 오가고 앉아서 밥을 먹기 시작한다. 3살배기 아들은 졸린 탓 인지 몸을 비비 꼬며 칭얼거린다. 소영의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자 소영은 피곤해하며 몸을 일으킨다.

-맨날 아기 보는 것도 지겨워.

폐백이 끝났는지 식당 안에 모습을 나타낸 지영의 부모님이 식당을 돌면서 친척들과 지인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소영은 입맛이 없다며 갈비를 한 접시 가져온다.

-지영이 아버님이시네, 공기업 간부급이래, 지영이 졸업하자마자 공기업에 바로 취직했잖아. 부러운 계집애, 가질 수 있는 건 다 가졌어, 훈남 남편도 아버지가 소개해 준거래. 남편이 한 달 매출액이 억대라지.

소영은 3살배기 아들을 손수 먹이고 있는 남편을 흘긴다. 난 머쓱하게 대답한다.

-그러네.

소영이가 갈비를 맛있게 살을 발라먹지만 뼈 주위에 붙은 살덩어리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다. 지영이와 친한 척하는 소영이 보단 내가 지영이와 가깝다는 사실, 2주일 전 카페에 앉아 하객 명단을 두고 지영이가 소영이를 부를지 말지 고민했다는 사실도 그녀는 모를 것이다. 굳이 관계를 따지고 싶지도 않고 어차피 내 결혼식에 와서 축의금만 내주면 그만인 동창과 사이가 나빠질 필요는 없다. 이런 인간관계는 좋은 게 좋은 거다.


한복을 입은 지영이가 신랑과 함께 하객들의 식탁 사이를 돌며 인사를 권한다. 돌고 돌아 우리 자리로 오자 소영이가 지영의 손을 잡고 축하한다며 호들갑을 떤다. 떨떠름한 표정의 지영은 나와 눈빛교환을 살짝 나눈 뒤 서둘러 자리를 피한다. 소영은 아이에게 먹일 죽을 숟가락으로 푼 다음 입으로 바람을 호호 불어 식히는 남편에게 지영과 자신이 얼마나 학창시절에 단짝이었는지 설명하다가 중간마다 나의 호응을 요구한다.

-그치~ 우리끼리 수업 땡땡이 치고 영화관도 갔었지.

-응.

-하필 대출해 주기로 한 후배가 들키는 바람에 다음날 우리 모두 교수실로 불러 갔잖아.

-그랬지.

나의 기억에도 없는 얘기지만 지영이와 했을지도 모르니깐 사실여부는 묻지 않았다. 나와 준호는 이미 다 먹은 접시를 앞에서 소영이의 입이 재잘거리는 것을 멈추고 식사를 끝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핸드폰에 문자가 온다. 지영이 ‘지금 신혼여행 떠나, 와줘서 고마워.’ 라고 썼다. 나는 소영을 피할 구실을 찾고 일어선다.

-맛있게 드시고 오세요. 다른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갈게~

-결혼식 잡히면 전화하고 결혼 전에 궁금한 거 있으면 연락해~ 내가 결혼한 선배로써 도와줄게

-고마워.

인사를 끝내고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간다. 지영은 언제 옷을 갈아입었는지 신랑과 커플티를 입고 나에게 손짓한다. 

-잘 다녀와~

-호텔 도착하면 연락할게.

-응.

지영은 준호에게 가볍게 고개 끄덕임으로 인사하고 차에 오른다. 빨간 리본을 매단 자동차는 시동을 걸고, 이내 다른 차선으로 합류한다. 손을 흔들던 지인들은 각자의 길을 가고 눈이 마주친 지영이 어머님과 가벼운 묵례를 하자 아버님도 어머니를 따라 나에게 인사를 하신다. 지영이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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