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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Oct 08. 2024

8.리처드 샌더슨 '리얼리티'

-어머니 저녁에 뭐해?

-별일 없는데

-그럼 우리 쇼핑할까? 일찍 퇴근할게.

-그래.

-예쁘게 준비하고 있어.

백화점 1층은 온갖 향수와 화장품 냄새로 가득 채웠다. 어머니는 화장품 판매대에서 메이크업을 받으신 뒤, 명품 화장품 세트를 구입하고, 주얼리샵에 가서 기존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시고 새로운 반지를 네 번째 손가락에 끼신다. 어머니는 새로 산 옷과 구두로 예쁘고 화사하게 변신하신 뒤, 나와 맛있는 저녁식사로 레스토랑에 들러서 파스타를 포크에 감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 나는 사진관 앞에 차를 세운다.

-엄마 나 증명사진이 필요한데 사진관에 잠깐 들릴까?

-괜찮아.

사진관에 들어가서 자연스럽게 나의 증명사진을 찍는다. 증명사진 촬영이 끝나고 암막을 젖히고 대기실로 나오며 어머니에게 묻는다. 

-엄마도 이번 기회에 하나 찍는게 어때?

-내가 쓸데가 어디 있다고?

-사진은 쓸데가 있어야 찍나? 오늘 너무 예뻐서 사진으로 남겨 놓고 싶어서 그렇지.

어머니는 나의 재촉에 마지못해 머리를 손질하고 증명사진을 찍기 위해 의자에 앉는다. 사진사의 말에 따라 살짝 웃는 어머니의 표정, 끊임없이 죽고 싶다던 어머니의 우울증이 온몸을 삼키기 10년 전으로 돌아간 모습이었다. 너무나 여리고 착하신 분, 아버지에 대한 쓰라린 상처와 나를 향한 미안함, 서투른 사회생활에서 받은 상흔을 마음속에 눌러두던 어머니는 그렇게 응어리를 풀어내는 중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어머니의 슬픔을 가두던 벽에 생긴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이젠, 너희 아버지 잊을 거야.

-어?

-잊어보려고 홍일수라는 사람, 다른 여자랑 행복하게 살고 있다며, 그럼 됐지. 그 사람이 행복하다면. 그걸로 됐어.

-엄마? 괜찮은 거야?

두 볼이 붉어진 엄마는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예전의 대학교 시절의 추억을 떠올린다.

-대학교 때, 너희 아버지, 학교 근처 유명한 잘생긴 DJ 오빠였는데, 그때 인기 많았지. 그 레코드 바가 여고생과 여대생으로 문성성시 될 만큼 선망의 대상이었으니깐, 항상 그가 보이는 자리에 앉아서 눈길만 마주치면 부끄러워서 다른데 보는 척 시선을 돌리곤 했어, 처음 나눈 얘기, 처음 같이 먹던 음식, 처음 같이 걷던 길이 생각난다. 그때는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설레서 아무런 생각을 못했어.


부모님이 나보다 어렸을 때, 대학교에서 성악을 배우던 어머니와 레코드 바 DJ 겸 기타리스였던 아버지의 러브스토리는 어린 시절 부모님 대화에 단골 주제였다. 어머니는 항상 같은자리에서 DJ소년에게 리처드 샌더슨의 리얼리티를 신청곡으로 적던 소녀였다. 수줍게 전달한 신청곡을 들으며 서로 눈이 마주치곤 했다. 얼굴을 붉히던 소년은 소녀에게 쪽지를 건네기 시작했고 핸드폰도 없던 그 시절, 기나긴 그리움으로 서로의 추억을 적셨다. 소년은 기타를 치며 소녀에게 청혼했고 소녀는 소년과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소녀는 소년을 데리고 집에 초대하던 날, 소녀의 부모는 꿈만 있는 가난한 소년을 반대했다. 소년은 사랑하는 소녀를 위해 꿈을 접고 평범한 가장이 되었다. 누구나 그 시절에 그러하듯, 소년은 그렇게 아버지가 되었다.

어머니의 옛사랑의 슬픔, 10년 동안 연락조차 없는 타인이 되어 버린 아버지에 대한 미련, 어머니의 아픔을 알기에 나는 추억의 고리를 잘라 이어 붙인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엄마가 힘들었을 땐 아버지는 없었잖아. 내가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항상 남의 집 가정부 살이, 홀 서빙 알바 해야 했어, 그렇게 번 돈으로 아버지는 악기점을 차렸고, 그 악기점 날린 게 누군데? 엄마를 다시 바닥으로 밀어 넣은 게 누군데?

답은 알지만 서로의 생체기를 보여주기 싫어서 상흔 자체를 꺼내지 않은 이야기, 잊고 싶은 기억까지 들추어 난도질한다. 

-그 사람의 꿈을 지켜주고 싶었어. 너희 아버지가 기타 칠 때 얼마나 행복한 표정을 지었는지 알아? 그때는 엄마는 고생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

-엄마도 엄마 인생 살아야지. 그만큼 고생했으면 행복하게 살 때도 됐잖아. 

-사실 기억이 잘 안나, 연주아빠 얼굴이.

나도 아버지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깊게 파인 주름, 서글픈 눈동자, 어렴풋이 윤곽만 잔상이 남을 뿐, 구체적인 생김새가 기억나지 않는다. 흩뿌려진 안개처럼 아버지의 존재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어두워진 하늘, 방 안 책상에 앉아, 노트북으로 100문항의 답을 적는다. 어머니의 이름, 나이, 주소, 출생지, 초등학교 이름, 중학교 이름, 고등학교 이름, 어머니의 자녀는 나,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은 삼겹살, 어머니가 싫어하는 음식은 생선, 어머니의 몸무게는 54키로, 키는 157센티미터, 어머니의 취미 생활은 화초 키우기, 특기는 기타 치며 노래 부르기, 어머니의 이상형을 적는 란에 아버지라고 기재했다가 지운다. 어머니를 설레게 했던 유일한 남자가 아버지였다. 두 분이 서로를 바라보는 애정이 가득한 눈빛, 기억의 끝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언성을 높이던 어느 날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떠나기 전날, 남에게 싫은 소리 하나 못하던 어머니의 언성이 높아졌다.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고 사기꾼을 뒤쫓던 몇 달 동안, 노가다하며 2~3일 만에 벌어온 푼돈으로는 대출금을 갚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외할아버지 유산으로 받은 집이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아버지가 언젠가는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오랜 기다림, 어머니가 너무 많이 지쳤다는 것도 안다. 아버지와 나누었던 마지막 말이 상기된다.

‘이렇게 무책임한 사람이라면 차라리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 나 당신 만난 거 후회해. 차라리 그때 부모님 말 듣고 당신이랑 헤어져야 했어! 이집 넘어가면 당신 다시 안 볼 거야!’

어머니의 독기 어린 소리가 아버지의 가슴을 할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수능 준비생의 나의 공포를 가중시킨다. 아버지는 말을 삼키며 끝자락만 간신히 내뱉었다.

‘미안하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현관으로 내쫓고 방문을 세게 닫으셨다. 어머니는 서럽게 우셨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달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집 밖으로 나가셨다. 그날 저녁 늦은 밤에 돌아오신 아버지는 어디서 마련했는지 출처도 불분명한 돈을 어머니에게 내미셨다. 

그 다음날 아침을 먹던 아버지는 평소와 다름없이 대문을 열고 집밖으로 출근하려 나가셨다.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말 한마디 없이 떠났던 그 뒷모습이 아버지의 마지막 기억이다. 희끗거리는 머리카락 아래, 검은 재킷을 입은 아버지의 뒷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기억을 자르듯, 낯선 곳에서 온 핸드폰 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흥신소입니다. 이분 찾기가 쉽지 않아. 신용불량자에 말소 상태야. 최근에 고용된 흔적도 없어. 당신하고 무슨 관계야?

-그냥 아는 사람이에요.

-이사람 빚이 상당하던데, 채권자야?

-아니요, 아예 못 찾나요?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10년 전에 지방 카바레에 봤다는 목격자가 있어

-어디요?

-전라남도 영암에 오일장 열리는 시장 근처 카바레래. 

-알겠습니다.

-계속 찾아보고 연락 줄게.

-예.

비위 상한 반말을 툭툭 내뱉는 흥신소 사람보다 아버지의 행적이 카바레 다니는 딴따라라는 답이 더 난감하다. 그에게 아버지 직업에 대해 거짓말을 한 게 다행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노트북에 정신 집중하고 쓰다만 100문항의 답을 최대한 성실하게 기입한다.

회사에서 근무시간 내내 아직 완성되지 못한 100문항 답을 틈틈이 채운다. 점심시간에도 식사 대신 ‘어머니의 잠꼬대는 무엇인가요?’ 문항과 씨름하는 중에 준호가 사내 메신저로 물어본다. 

-왜 점심 안 먹어?

-좀 급한 일이 있어서요.

-그래도 점심은 먹고 일해야지. 이번 주말에 약속 있어?

-없어요.

-그럼 아버님 뵈러 가면 안 되나? 경남 어디라고 했잖아. 너희 부모님 안 뵙고 우리 부모님 먼저 인사드린 게 맘에 걸려서 말이야. 아버님은 요즘도 바쁘셔?

-예. 새로 시작한 사업이 바쁘신 것 같아요.

-지금 내려가면 아버님이 불편하실 수 있겠네. 2개월 뒤에 아버님 뵐 수 있겠지?

-그럼요.

-알았어, 일 마무리 잘하고 얼른 점심 먹어.

-예.

그가 메신저 창에서 나가자, 현란한 카바레 조명 밑에서 그와 함께 아버지의 질퍽한 노래를 감상하며 박수를 친 뒤, 그와 아버지가 마주보고 인사할 생각을 하니깐 소름이 끼친다. 아버지를 빨리 찾아서 건축가로 둔갑하던가 아니면 어머니의 재혼을 성공시키던가, 내가 그와 결혼하는 방법은 둘 중 하나다. 다시 심호흡을 깊게 내쉰 후, 정신 집중하고 100문항의 답을 기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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