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에세이]
매일 동네 뒷산을 오르는 게 요즈음 나의 중요한 일과다. 잘 다듬어진 산책로는 하루가 다르게 커지는 나뭇잎 덕분에 녹음이 짙어지는 중이다. 초록색 이파리 사이로 살짝살짝 드러나는 조각보 같은 하늘이 오늘따라 유난히 파랗다. 깍깍, 찌리찌리, 삐쭈삐쭈, 뻐꾹. 경쾌하게 어우러지는 새들의 지저귐에 귀가 즐겁다. 산들바람이 꽃향기를 몰고 온다. 나는 참지 못하고 마스크를 벗어 던진다. 진한 꽃내음을 한껏 들이마시니 허파가 크게 부풀어 오른다.
주위의 미생물 따위를 죽인다는 피톤치드와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산림욕의 효능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는 순간 코가 간질간질하다. 손에 쥐고 있던 마스크를 얼른 쓴다. 기침 예절을 지키라는 교육의 결과다. 에취, 에취, 에취. 눈물이 찔끔 날 만큼 강한 재채기가 연거푸 나왔다. 매일 마스크를 쓰고 다니기 때문인지 작은 자극에도 몸이 격한 반응을 보였다.
재채기의 원인을 찾기 위해 사방을 둘러보았다. 솔바람에 입자 고운 노란 가루가 안개비처럼 내렸다. 아, 송홧가루. 가는바람만 불어도 소나무는 꽃가루를 방출했다. 바닥에 떨어진 아카시아꽃이 노란 가루에 덮여 있었다.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교과서에 실려 있던 열여덟 단어의 짧은 시에서는 가혹하고 잔인한 보릿고개의 슬픔이 묻어났다. 그러고 보니 지금이 윤사월이다. 해가 길어 허기졌던 지난날보다 마스크를 벗지 못하는 올해 윤사월이 더 잔혹한 거 같다.
지난해 중국 우한에서 원인 모를 호흡기 질환이 생겼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 바이러스는 코로나19라는 이름을 얻었다. 정식 병명은 COVID19이다. 이 바이러스가 나타난 이후의 삶은 이전의 삶과 너무 다르다. 제일 먼저 피해야 할 존재가 사람이고 가장 두려운 존재도 사람이 되었다. 전 세계에서 이미 수십만 명이 죽었고 계속 죽는 중이다. 가장 부유한 나라라는 미국에서조차 사람들이 양식을 얻기 위해 길게 줄을 선다. 문제는 국경도 인종도 빈부도 구별하지 않는 바이러스가 여전히 확산 일로에 있다는 데 있다.
눈물이 쏟아지게 재채기를 하고 바위 위에 멍하니 앉아 있자니 어슐러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라는 짧은 소설이 생각났다. 왕도 없고 노예도 없고 죄인도 없는 도시 오멜라스는 낙원이다. 그러나 이 낙원이 유지되려면 반드시 한 아이의 희생이 있어야 한다. 한 영혼만 고통을 당하면 그 낙원에 있는 수백만 명이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모든 시민이 아이의 존재를 알면서도 자신의 행복을 위해 아이의 고통을 묵인한다. 아이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사람들의 잔인함에 분노를 느낀 몇몇 사람들만이 오멜라스를 떠날 뿐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아이를 구하지 않고 그대로 두고 떠난다.
바이러스의 창궐을 막기 위해 여러 나라에서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이동 금지령을 내렸다. 대한민국 국민인 우리가 이동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제한당하지 않은 건 수많은 사람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인데 클럽을 전전하며 광란의 밤을 보낸 젊은이나, 격리 시설에서 탈출한 사람들은 오멜라스의 사람들처럼 타인의 희생을 내 행복의 조건으로 여긴 모양이다. 내가 부모와 조부모, 혹은 알지 못하는 타인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방역 수칙을 어기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테니까.
이천 년 전에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 그 예수님이 노숙자가 되어서 돌아왔다. 서소문 역사공원에 가면 검게 처리한 금속으로 만든 노숙자 예수(Homeless Jesus)상이 있다. 맨발의 예수님이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벤치에 모로 누워 잠들어 있다. 못 자국이 선명한 발등을 담요 밖으로 비죽이 내밀고서. 조각가 티모시 슈말츠가 사람들에게 자선에 대한 영감을 주기 위해 2013년 이 조각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2016년 로마 교황청 빈민 식당 앞에 세워졌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이 예수를 상징하는 아름답고 훌륭한 재현물이라 평하며 축복한 이후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우리나라 평화의 소녀상이 세계 곳곳에 설치되고 있듯이 노숙자 예수상 역시 100여 곳에 자리하고 있다. 서소문 공원에는 2019년 6월 설치되었다.
소나무꽃이 동시에 발아한 건 이상고온 때문이고, 박쥐 몸에서 살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온 이유는 서식 환경이 열악해져서라고 하니 세상 모든 일이 인과관계에 기인한다는 말은 진리다. 자연과 더불어 살려고 하지 않고 인간이라는 종의 이익만 챙기는 것이나, 나 하나의 행복만 추구하며 방역 수칙을 지키지 않는 개개인의 행태는 닮은꼴이다. 집단적인 혹은 개인적인 이기심 덕분에 우리는 또다시 긴 시간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화창한 봄날 아카시아 꽃잎과 송홧가루가 흩날리는 오솔길을 걷는 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건 노숙자가 된 예수와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용직 근로자들은 거리 두기를 할 겨를이 없다. 세계 곳곳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풍찬노숙하며 하염없이 걸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한다. 죽더라고 고향에 있는 가족 곁에서 죽기 위해서라니. 예수님이 이 시대에 계신다면 그들과 함께 거리에 머무르시지 않을까?
(초록별에게 보내는 편지, 2020, 열린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