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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신 Jun 05. 2021

[단편소설]

    

  겉뜨기 두 코, 안뜨기 두 코, 겉뜨기 여섯 코, 안뜨기 여섯 코…, 겉뜨기 세 코 후 세 코 안으로 잡고…. 앗, 코가 하나 빠져 있다. 빠진 코를 줍고 실을 푼다. 꼬불꼬불하게 풀린 실을 감은 다음 다시 뜨기 시작한다. 정확하게 코를 세어 뜬다고 했는데 코가 또 빠져 있다. 코를 줍고, 실을 풀었다가 감은 다음 다시 뜬다. 스웨터를 영원히 완성하지 못할 것 같아 조바심이 난다.

  달가닥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하얀 모자를 쓴 아주머니가 침대마다 재빠르게 식판을 놓았다. 내 침대에 붙어 있는 ‘금식’ 팻말을 확인한 그녀가 잠시 나를 내려다보더니 병실을 나갔다. 그제야 스웨터를 뜨고, 풀고, 다시 떴던 게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걸 알았다.

  잠시 뒤에 열 번째 수술이 시작될 예정이다. 수술이라는 단어를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리는 내 눈에 부겐빌레아가 들어왔다. 손가락을 배에 심는 수술을 하던 날, 어쩌다 얼굴만 삐쭉 보이고 가던 딸이 웬일인지 아침 일찍 왔다.

  “아빠가 가져가라고 했어. 엄마 기분이 좋아질 거라며. 무거워서 혼났어.”

  파란색 화분을 침대 옆 탁자에 올려놓으며 딸이 말했다.

  진분홍 꽃받침 안에 앙증맞은 흰색 꽃이 세 개씩 피어 있는 희한한 꽃나무인 부겐빌레아는 남편과 나를 이어준 중매쟁이다. 진분홍색이 꽃이 아니라 꽃받침이라고 알려준 사람이 그였다. 그가 정성껏 돌본 덕분인지 햇빛이 잘 들지 않는 병실인데도 떨어진 꽃송이가 없었다. 진분홍 구름 속에서 살짝살짝 얼굴을 내민 하얀 꽃들이 이번 수술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 알려주는 거 같았다.

  경험의 횟수와 비례해서 수술이 편안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수술이 거듭될수록 공포의 강도도 점점 세졌다. 호흡조차 멎어버릴 거 같다. 언젠가부터 나는 다만 이번 수술이 마지막이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수술실에서 마취를 기다리는 동안 침대 난간이 다다다다 소리를 냈다. 아무렇지도 않다, 별 것 아니다, 하며 나 자신을 달래 보지만 자동으로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첫 수술을 했던 날, 불안하고 초조했던 그 순간, 어렸을 때 들었던 옛날이야기가 떠올랐다. 계모의 음모로 손이 잘린 채 쫓겨난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손이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우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려고 본능적으로 팔을 뻗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차가운 우물물에 팔이 닿는 순간 손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내게도 그런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오른손 엄지를 살리기 위해 열 번이나 되는 수술을 감내한 이유는 왼손 검지가 불완전하기 때문이었다. 관절 부분이 부러져 철심을 두 개 박았는데 회전 유합이 된 데다 강직이 와서 펴기도 어렵고 구부리기도 어려웠다. 나무로 깎아 만든 손가락처럼 뻣뻣하게 곧추서 있었다. 엎친 데 덮친다더니 오른손 엄지마저 잘리고 말았다.

  마취제가 정맥을 타고 들어가자 경직된 근육이 풀리며 서서히 경련이 멈추었다. 수술방에서는 고향 집 방안을 떠돌았던 씁쓸하고 독한 소독약 냄새가 났다. 희미한 의식 속에 아버지의 손이 나타났다. 붕대에 감긴 아버지의 왼손이 눈사람 얼굴처럼 둥그렇고 하얬다. 나는 방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아버지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신음을 들었다. 다섯 살 아이는 아버지의 하얀 손이 무서웠다.

  아버지는 손으로 물건을 만드는 재주가 남달랐다. 철판을 잘라서 화목난로와 드럼통 모양으로 생긴 군고구마용 오븐과 고기를 굽는 철제 테이블을 만들었다. 어느 날 철판을 자르는 칼날이  아버지의 중지와 약지 끝을 잘랐다. 몇 달이 지나서 아버지가 손에 감긴 붕대를 풀었을 때 신기하게도 손톱이 다시 자라나 있었고, 손가락도 원래 모양 그대로였다. 나는 긴 꿈을 꾼 거 같았다.

  나중에 아버지는 의사 말대로 봉합했으면 손톱 부분이 없는 뭉툭한 손가락이 되었을 거라고 말했다. 잘려나간 부위가 으깨져서 접합 수술이 불가능하다며 의사가 봉합하려고 했지만, 아버지는 손톱 뿌리 부분이 남아있으니 봉합하지 않겠다고 우겼다는 것이다. 손톱이 제대로 자라나지 않는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테니 기다려보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의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손가락을 싸매 주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손톱도 자라고 손가락도 원래 모양을 되찾았다는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으셨다. 항생제를 먹는 건 물론이고, 캡슐을 열어서 가루를 손가락에 듬뿍 뿌린 다음 꽁꽁 묶어 두었더니 손가락이 원래 모양을 찾더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 후로도 오래오래 철판을 잘라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만드셨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처럼 할 수 없었다. 엄지손가락이 통째로 절단되었기 때문이다. 이틀이 멀다 하고 병원에 오신 아버지는 손재주만 닮으면 되지 손가락 잘리는 건 왜 닮느냐며 눈시울을 붉히셨다.

  아버지는 자신의 손재주를 물려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아들인 동생보다 딸인 나를 더 이뻐하셨다. 나는 뜨개질이 재미있었다. 생애 최초의 작품은 초등학교 일학년 때 대바늘과 털실로 짠 목도리였다. 내 팔길이만 한 목도리는 겉뜨기만으로 이루어졌다. 안뜨기를 배운 다음 메리야스 뜨기로 아버지를 위한 목도리를 짰다. 동생의 모자와 엄마의 스웨터와 내 반코트까지. 내 손에서 태어나는 작품의 종류가 점차 늘어났다. 여름에는 하얀 실로 코바늘뜨기를 했다. 라운드 티셔츠나 원피스에 내가 뜬 하얀 칼라를 붙이면 옷들은 고급스럽게 변했고, 나는 이런 변화가 자랑스러웠다. 꽃병 받침이나 식탁보는 물론이고 카디건도 떴다. 대바늘과 코바늘만 있으면 못 만들 게 없었다. 고등학교 일학년 때 뜨개질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친구들이나 동네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준 것뿐인데 그들은 들어간 실 값보다 많은 돈을 주었다. 수입으로는 별 게 아니었지만 내 손으로 번 돈이라 몹시 기뻤다.

  뜨개질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편직 공장에 취업했다. 요즘은 컴퓨터를 이용한 작업이 대세지만 소량 생산하는 고급 니트는 여전히 사람과 기계가 일대일로 작업한다. 원사 염색도 손으로 하고, 소매, 앞판, 등판, 앞가슴을 연결하는 바느질도 손으로 한다. 자수를 놓고, 반짝이나 구슬을 붙이는 과정에도 사람 손이 필요하다. 생활의 달인에 나왔던, 암흑 속에서 양복을 꿰매던 장인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이 모든 공정을 혼자 할 수 있는 기술자였다. 달인의 명칭을 얻은 그 여자는 여남은 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서 일하고 있었다. 편직기 때문에 내 작업장이 훨씬 넓지만, 일용직이라는 점에서는 같았다. 의류산업 자체가 사양길에 접어든 탓에 밤을 새워 일해도 호시절 주간수당에 못 미치는 일당을 받았다. 문을 닫은 공장이나 가게도 많은 터라 불평할 수는 없었다.

  엄지손가락이 잘리던 날도 야근조였다. 퇴근하기 전 언제나처럼 기계 상태를 점검했다. 기계 사이에 실 같기도 하고 보풀 덩어리 같기도 한 게 끼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집는 순간 탁 소리가 났다. 분명히 전원을 껐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악 소리도 내기 전에 손가락이 잘려나갔다. 손가락이 잘렸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사장님께 전화해야지’였다. 바로 옆에 소방서가 있었건만 119를 부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랬다면 응급조치를 받고 잘려나간 손가락도 나와 함께 병원으로 왔을 것이다. 사장님에게 전화한 후 왼손으로 오른손을 꽉 누르고 택시를 탔다. 살짝만 베어도 쓰리고 아프다. 그런데 손가락이 싹둑 잘려나가고 나니 오히려 아픈 줄 몰랐다. 피도 별로 나지 않았다.

  손가락이 잘렸다는 말을 들은 기사가 대학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응급실은 아수라장이었다. 복도에도 사람들이 누워있었다. 내 발로 걸어 들어간 나를 보고 간호사가 어디가 아파서 왔느냐고 냉랭하게 물었다. 손가락이 잘렸다고 하자 그녀가 급히 의사를 불렀다. 응급처치한 젊은 의사가 “빨리 접합 전문병원으로 가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이렇게 큰 병원에서 치료하지 못한다면 어디서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내게 “대학병원에서는 이런 수술 안 해요.”라고 짤막하게 말한 그는 다른 환자를 보러 갔다. 어느 병원으로 가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처음 나를 맞이했던 간호사가 다가와서 수지 접합을 하는 전문병원으로 가야 한다며 병원 이름을 적어주었다.

  나는 또 택시를 탔다. 접합 전문병원 의사가 “손가락은 어디 있어요?” 하고 물었을 때야 비로소 편직기 사이에 손가락을 남겨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하는 게 몸에 배어 있어서 위기의 순간에도 119를 부르거나 병원 구급차 좀 태워달라는 말을 할 생각이 나지 않았다. 빨리 가자고 애꿎은 택시 기사만 들볶았다. 사장님이 기계에 끼어 있던 손가락을 가지고 온 다음에야 수술이 시작되었다. 혈관과 신경을 무사히 이었다고는 하는데 손가락이 살아날지는 미지수였다.

  밤마다 돌부리를 부여잡고 안간힘을 쓰면서 수직으로 난 바위 절벽을 기어올랐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되는데 손가락이 잘려 나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위에 붙어 있는 손가락을 보며 아득히 떨어져 내리다가 눈을 뜨면 쏟아지는 불빛에 눈이 부셨다.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하면서 끊임없이 절벽과 병실을 오갔다. 꿈인지 현실인지 환각인지 구분되지 않는 날이 오래 계속되었다.     

  침대를 가리는 커튼과 흰 벽뿐인 병원에서 하루바삐 나가고 싶은 마음과 달리 나는 최장기 입원자가 되었다. 옆 침대의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한 달 이상 입원했던 사람은 두 명이었다. 그들이 퇴원한 이후에도 목소리는 유령처럼 병실을 떠돌았다.

  대형마트는 청소를 밤에 혀. 바닥에 왁스 작업을 하는디 자정부터 새벽 5시까지 하거든. 그날따라 감독이 일반 세정제를 쓰지 않고 묵은 때 벗기는 엄청 미끄러운 걸 쓴 거여. 나는 그걸 몰랐제.

  초등학교 급식실에서 일해요. 10년 넘게 써오던 야채 절단기를 바꿔 달라고 했는데 안 바꿔 줘서 서로 안 쓰려고 하는 거예요. 근데 메뉴가 카레라이스였어요. 손으로 작게 썰려면 힘드니까 절단기를 써야 했어요.

  남자들이 첫 마포 질을 하면 여자들이 둘째 마포 질을 하는데 아무도 없는 거여.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한 발을 내딛다가 바로 넘어져 버린 겨. 쿵 소리가 나더라고. 머리를 다친 줄 알았제. 가만히 누워있다가 일어나려고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는데 엄청나게 아파서 아, 팔이 잘못됐나보다 하고 보니 손이 팔목과 어그러져서 반쯤 옆에 가서 붙어 있는겨.

  기계가 후져서 재료를 넣고 너무 기다리면 부서져요. 빨리빨리 다음 재료를 넣어야 해요. 당근을 넣을 때 기계를 잘 잡고 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나 봐요. 기계가 가운뎃손가락을 탁하고 쳤고, 손이 기계 사이에 끼었죠. 무서워서 볼 수가 없었어요.

  꿈속에서 나는 마트로, 학교 식당으로 갔다. 마트에서 넘어지고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었고, 학교 식당에서 야채 절단기에 손이 끼었다. 언제나 비명을 질렀는데 소리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입안에 갇혀 있었다. 비몽사몽 중에도 나는 다시 살아난 아버지의 손가락을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내 손은 기능적인 면뿐만 아니라 형태적인 면에서도 아버지의 손을 닮았다. 아버지의 손은 피부가 거친 것만 빼면 상당히 보기 좋은 손이었다. 손바닥이 두툼하고 마디가 굵었지만 손가락은 길었다. 큰 손으로 섬세한 작업을 하는 아버지의 손을 보며 나는 모종의 경이로움을 느끼고는 했다. 원래 모습을 되찾은 내 손이 아버지의 손과 겹쳐졌다.     

  혈관과 신경을 잇는 최초 접합 수술은 무려 일곱 시간이 걸렸다. 신경이 너무 많이 뽑혀 나간 탓인지 손가락 끝이 감각이 없었고 앙상하게 뼈가 드러난 부위의 피부도 재생되지 않았다. 엄지손가락을 살릴지 말지 결정해야 했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엄지를 살리고 싶었다. 재활치료를 열심히 하면 바느질도 뜨개질도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도 왼손 검지가 시원치 않으니 오른손 엄지는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붙여두었던 손가락을 다시 떼어 냈다. 신경이 죽은 부위는 잘라내고, 복부를 15cm 정도 절개한 다음 나무 심듯 잘라낸 손가락을 심었다. 뱃살이 손가락에 살을 나눠주기를 기대하면서.

  마트에서 손목이 부러졌다는 여자가 측은한 눈길로 나를 보며 내 시중을 들어주려고 애썼다. 붕대로 싸맨 크기로 보아 자기가 더 중한 환자라고 여기던 그녀는 희망을 잃지 말라고 나를 다독였다. 산재로 인정받기 위해 노무사를 고용했다는 그녀는 한 손 엄지의 기능만 잃어도 장애 등급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엄지 하나가 팔 하나, 다리 하나, 발가락 열 개 만큼 가치가 있다는 거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내뱉은 지체장애인이라는 단어가 끔찍했다. 그녀는 입원 기간 내내 119를 부르지 못하게 했던 팀장을 원망하며 용역회사 소속인 자신의 신분을 한탄하고는 했다.

  119를 불러야 하는데 마트에서 알면 안 된다면서 못 부르게 하는 거여. 너무 아파서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눈밭에 맨몸으로 선 것처럼 추웠어. 팀장이 나를 태우고 병원으로 가면서 집 화장실에서 넘어졌다 하라고 하더군. 기절할 것처럼 아픈 걸 참고 있는 내게 거짓말까지 하라고 강요하는겨. 감독을 죽이고 싶었어. 그런데도 나는 시키는 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어. 쫓겨날까 봐. 의사가 화장실에서 넘어졌는데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느냐고 하면서 뼈를 맞추는데 정말이지 톱으로 뼈를 켜는 거 같았어.

  억울함을 호소하던 그녀는 동료들이 가지고 온 비타민이나 주스 같은 것들을 남기고 깁스한 하얀 손을 흔들며 병실을 떠났다. 119를 이용하지 못했다는 결과는 같았지만, 나는 탓할 사람이 없었다. 잘 가라는 인사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보냈다. 통원치료만 받으면 된다는 그녀가 부럽기만 했다.

  급식실에서 손을 다친 여자는 입원한 지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침묵을 분노나 후회라고 마음대로 해석했다. 배에서 꺼낸 손가락을 손에 붙이던 날, 이렇게 신기한 수술은 처음 본다며 그녀가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그녀는 나처럼 손가락이 싹둑 잘린 건 아니었다. 중지 뼈만 톱날처럼 부러진 상태였고, 119를 타고 왔기 때문에 응급처치도 잘 되었다고 했다.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왼손으로 오른손을 부여잡고 택시를 탔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무능하고 무기력했다는 생각에 자조의 한숨이 나왔다. 나를 따라 한숨을 쉬며 그녀가 말했다. 일손이 부족해서 동동거릴 동료들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아요. 방학이 지나도 일할 상태가 되지 않으면 그만둘까 봐요. 모두에게 폐를 끼치니까요.

  그녀의 한숨과 내 한숨은 차원이 달랐다. 이 마당에 다른 사람에게 폐 끼칠 게 걱정이라니, 불구가 되지 않았으니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속 편한 걱정을 하는 그녀가 얄밉기만 했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한 사람의 근로자로서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는 나처럼 남편도 자신을 탓했다. 사고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온 남편이 많이 울었다. 내가 화원을 말아먹지만 않았어도, 빚만 없었어도 당신이 밤마다 일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돈을 많이 벌어주지 못해 미안하고 고생시켜서 미안하다고 빌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어떻게 하겠느냐고, 긍정적인 생각만 하고 나쁜 생각은 절대 하지 말라고, 당신 손발이 되어 주겠다고, 죽을 때까지 서로를 아끼면서 살자고….

  고마운 말 몇 마디로 모든 게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아버지의 하얀 손만 생각났다. 아버지는 어떻게 견디셨을까? 원래 모습을 찾은 아버지의 손가락처럼 내게도 기적이 일어날까. 눈물이 귓속으로 들어가는데도 돌아누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새내기 대학생인 딸은 일주일에 두어 번 오면서도 힘들다고 불평했지만, 남편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오전 열한 시쯤 와서 오후 두시까지 머무르며 밥을 먹이고, 세수를 시켜 주었다.

  남편을 아버지 작업장 근처에 있는 화원에서 처음 만났다. 콩으로 만든 음식이라면 무엇이든 좋아하는 아버지는 맷돌에 콩을 갈아서 두부와 콩국수를 만드는 식당에 자주 가셨다. 아버지가 트럭을 자갈 마당에 세우면 나는 화원으로 달려가곤 했는데, 마당을 사이에 두고 있는 화원의 꽃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토요일 오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커다란 비닐하우스 안에 온갖 꽃들이 피어 있었다. 누군가 등 뒤에서 “만지면 안 돼요.”라고 말했다. 늘 듣던 화원 주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움찔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부겐빌레아랍니다. 하나 사 가실래요?”

  화분을 들어 올리는 손의 주인은 선한 눈빛을 가진 젊은 남자였다. 긴 손가락처럼 얼굴도 기름했다. 진분홍색은 꽃이 아니라 꽃받침이라며 그가 웃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서둘러 식당으로

갔다. 한 주일 내내 앙증맞은 하얀 꽃이 생각났다. 일주일쯤 지나서 화원에 간 나는 손짓으로 부겐빌레아 화분을 가리켰다.

  “이 꽃은 햇빛을 좋아하니 양지바른 곳에 두어야 해요. 물은 흙이 촉촉해질 정도로만 주세요.”

  그의 말을 되새기며 화분을 앞 베란다에 놓았다. 물 줄 때를 가늠하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화분의 흙을 만져보았다. 애지중지 길렀건만 어느 날 아침에 보니 꽃들이 모두 떨어져 있었다. 하루아침에 꽃이 져버려서 속상했다.

  그날 이후 식당에 가도 화원에는 가지 않았다. 어느 날 자갈마당에 트럭을 세운 아버지가 뚜벅뚜벅 걸어서 화원으로 가셨다. 아버지가 들고 온 건 부겐빌레아 화분이었다. “이번에는 잘 키워보거라.” 하시며 내게 화분을 건네셨다. 잘 키우려면 화원에서 일하는 젊은 남자에게 묻는 수밖에 없었다. 부겐빌레아가 환경 변화에 민감하다는 것을 알았고, 꽃말이 정열이라는 것도 알았다. 최선을 다해 돌보았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주신 부겐빌레아도 잎이 누렇게 변하며 죽어갔다. 나무를 살리기 위해 화원의 젊은 남자에게 가지고 갔다. 쭈뼛거리며 화분을 내려놓고 죄지은 사람처럼 달아났다.

  몇 달이 지난 뒤에 그가 아버지와 내가 콩국수를 먹고 있는 식 당으로 왔다. 내가 오기를 매일 기다렸다면서. 그는 진분홍 꽃받침이 솜사탕처럼 얹혀 있는 부겐빌레아 화분을 주었다. 온 산에 진달래가 핀 것처럼 아름다웠다. 세심하게 나무에 정성을 기울이 는 사람의 심성이 나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의 남편이 되었고, 나는 그의 아내가 되었다. 소박하게 시작했지만 둘이 열심 히 일하면 잘살게 될 거라고 믿었다.

  눈앞에 손들이 어른거렸다. 씨앗을 심는 손, 묘목의 뿌리를 자르는 손, 화분에 옮겨 심는 손, 물을 주는 손, 모양을 잡기 위해 나뭇가지에 철사를 감는 손, 나뭇잎을 닦는 손, 손가락 끝이 살짝 뒤

 집히는 손재주 있게 생긴 손, 가무잡잡하고 거칠지만 내가 사랑하는 남편의 손. 그리고 내 손, 뜨개질하는 손, 나물 무치는 손, 걸레질하는 손, 빨래하는 손, 엄지가 잘린 나의 손.     

  손가락을 심은 지 보름쯤 지났을 때 배에서 꺼낸 엄지를 손에 붙였다. 그런데 피부가 온전히 살아나지 않았다. 허벅지에서 피부를 떼어내 손가락에 이식했다. 2주일을 기다렸지만 실패였다. 2차 이식 수술을 하던 날 마취과 의사가 아니 여기 왜 이래?” 하고 소리쳤다. 그는 입을 딱 벌리면서 많이 아팠을 텐데 어떻게 참았어요? 하고 물었다. 정말이지 나는 모든 통증이 손가락 때문에 오는 줄 알았다. “면역력이 떨어지면 대상포진이 오는데….”라는 간호사의 말을 듣는 순간 내 면역력이 형편없어서 회복이 더디고, 그런 연유로 수술이 되풀이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독한 아픔이었다. 옷깃이 스치기만 해도 따가웠고 쑤시고 찌르는 듯한 통증이 뒤를 이었다. 

  정맥주사를 맞으면 주삿바늘 꽂힌 주위가 퉁퉁 부었고, 엉덩이 살은 딴딴하게 굳었다. 핫팩으로 찜질을 해도 그때 뿐이었다. 대상포진약에 엄지를 위한 약까지 한 주먹씩 먹고 나면 명치끝을 쥐고 비트는 듯한 통증과 더불어 구역질이 났다. 위내시경 검사 결과 깨끗하다는 소견이 나왔지만, 속 쓰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위가 아파서 밤중에 잠이 깼고, 한 번 잠이 깨면 다시 잠들지 못했다. 칼날 잎을 가진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떨어지는 칼날에 온몸이 베인다는 검수지옥의 고통이 이럴까 싶을 만큼 끊임없이 통증에 시달렸다. 주사를 맞으면서 울었고, 밥을 먹다가도 울었으며, 한밤중에 자다 깨서도 울었다. 세 번의 피부 이식 수술을 받는 동안 손가락을 살리지도 못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 수술을 되풀이하는 것 아닌가 하고 의사를 의심하도 했다.

  나쁜 짓을 한 적도 없고, 성실하게 살고자 했을 뿐인데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하지 않고 그냥 집에서 놀았더라면. 야근하지 말라는 남편의 말을 들었더라면. 무슨 예감이라도 있었는지 남편은 수입이 줄더라도 낮일만 하라고 통사정을 했었다. 제발 집에서 좀 쉬라고 윽박지르기까지 했는데 나는 귓등으로 흘려버렸다.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 줄 알지만 두 아이 뒷바라지를 하려면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다. 특히나 예쁜 것을 좋아하는 딸 아이는 가지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다. 남편을 닮아 보기 좋은 손을 가진 딸은 손톱을 예쁘게 가꾸고 싶어 한다. 대학 입학 기념 선물 대신 네일샵에 데려가 달라고 졸랐을 정도였다. 딸 아이가 손톱 위에 사과도 그리고 꽃도 그리는 걸 보면서 내 손톱도 꾸미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하지만 나무막대 같은 왼손 검지와 마디가 굵고 거친 오른손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개 발에 편자고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누구의 손이든 예쁜 손보다 일하는 손이 보기 좋다고 자신을 달랬다.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손이 가치 있다고 믿고 싶었다.

  치장한 손톱에서 얻는 만족과 내 손끝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옷들을 보며 느끼는 행복을 단순하게 비교할 수는 없을 거 같았다. 한 벌 한 벌 만들 때마다 나는 언제나 정성을 다했다. 엄지가 잘리

 던 날 연두색으로 빛나는 초록색 원단을 짰다. 연둣빛으로 보이는 건 실에 세 가지 색이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가느다란 초록색 빗살 무늬가 염색된 실 위에 노란색 점이 찍혀 있었다. 투명한 시퀸(반짝이)을 일일이 감은 다음 광택이 있고 투명도가 높은 흰 빛깔로 전체 염색을 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초록색은 본 적이 없었다. 염색 장인의 솜씨가 분명했다. 이런 고급 실로 만든 옷은 한 벌에 수백만 원을 호가한다. 색깔이 너무 매혹적이어서 사장님께 어떤 옷을 만들 건지 물었다. 사장님은 오프 숄더 원피스를 만들 원단이라고 했다. 어깨까지 드러나는, 반짝이는 연초록 원피스를 입으면 누군들 아름답지 않겠는가. 재단이 끝나면 바느질도 내가 할 예정이었다. 딸에게도 이런 원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고 싶었다. 피부가 하얘서 그야말로 피어나는 연분홍 장미 같을 터였다.

  딸에게 예쁜 옷도 만들어 주지 못하고, 고 1인 아들의 학원비도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무엇보다 수술칼이나 가위, 핀셋 같은 도구를 보는 게 끔찍했다. 내 손가락을 자르기 위해 도구나 기계가 존재하는 거 같았다. 드레싱 할 때 들리는 금속성 소리나 식판 운반용 카트 구르는 소리에도 혈압이 높아졌다. 딸이 왔다 간 이후 혈압이 170까지 올라갔다.

  “엄마도, 할아버지도 도대체 왜들 그런 거야? 왜 꼭 그런 일을 해야 해?”

  딸은 집안일이 힘들다며 짜증을 냈고, 야근은 왜 했냐며 나를 나무랐다.

  그 일을 사랑하니까.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견딜 수 없어서. 나는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내가 하는 일을 너무 거창하게 포장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아마, 아마 우리는….

  “도대체 퇴원은 언제 하는 건데?”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딸이 물었다.

  “몰라, 나도 빨리 퇴원하고 싶어.”

  빨리 퇴원하고 싶은 사람은 나였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나을 거 같았다. 간호사가 하루에 몇 번씩 혈압을 재러 왔다. 마음을 편히 가지지 않으면 혈압이 더 올라갈 수 있다며 나를 달랬다. 하지만 나는 자다가 죽기를 바랐다. 죽으면 시도 때도 없이 밀려오는 통증에서 벗어날 테고, 사는 의미나 이유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피부 이식 수술만 성공하면 치료가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손가락이 어디에 살짝 닿기만 해도 자지러지게 아팠다. 물리치료 시간에 치료사가 그대로 두면 계속 아플 거라면서 아무래도 신경을 잘라버려야 할 거 같다고 말했다. 신경 절단 수술을 또 받았다. 절반이 겨우 남은 손가락에 또 칼을 댔다. 손톱 부분이 잘려 나가고 없어서 뭉툭하고, 여러 번 자르고 꿰매느라 흉터도 많아서 보기에 흉측했다. 

  신경 절단 수술까지 받은 내 엄지는 기능을 모두 잃었다. 조금 남은 부분에 연필 같은 것을 끼운 다음 떨어뜨리지 않고 유지하는, 단순한 그 동작을 위해서도 오랜 시간 재활이 필요하다고 했다.   침대에 앉아서 휴대폰을 뒤적이며 엄지에 대해 검색했다. 엄지 통증, 엄지 상실, 엄지 산재 등의 관련 기사나 문서, 커뮤니티 게시글 등을 훑었다. 엄지가 잘린 데 대해 손가락 하나 없을 뿐인데 뭐, 라거나 생명이 위중한 다른 환자도 많은데, 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엄지야말로 문명을 이룬 주인공 아닌가. 엄지가 짧아진 덕분에 인간은 도구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질’로 끝나는 여러 동작에는 엄지가 필요하다. 가위질, 젓가락질, 바느질, 뜨개질, 칼질…. 이제 나의 왼손도, 오른손도 ‘질’을 잘 할 수 없다. 그림자놀이조차 할 수 없는 손이 되었다. 개와 말의 한쪽 귀는 잘려나갔고, 꽃게의 다리에는 집게가 없었다. 엄지가 없어도 별문제가 없다면 의사도 그렇게 열심히, 조금이라도 살려보려고 애쓰지 않았을 것이다. 흉물스러운 손가락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났다.

  거듭되는 수술이 너무 힘들어서 엄지 없이 살겠다고 했을 때, 의사는 왼손도 불편한데 오른손 엄지마저 없으면 안 된다면서 포기하지 말라고 나를 다그쳤다. 내 손을 살피는 그의 손은 손가락이 길고 날렵했다. 접합 분야에서 이름난 명의라지만 오른손 엄지가 사라진다면 그 역시 혈관을 잇고 신경을 잇는, 섬세하고 복잡한 수술을 하지 못할 것이다.     

  부겐빌레아 화분 옆에 선 남편이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내가 일하지 못하니 보수가 나은 일자리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침에는 유치원생들을 실어 나르고, 오후에는 보습학원생들을 실어 나르는 남편은 기름값 등의 운영비를 제외하고 100만 원 조금 넘는 돈을 손에 쥐었다. 내가 벌 때는 생활도 하고 화원을 운영하다 진 빚도 조금씩 갚을 수 있었다. 예전에는 입주가 시작되는 신규 아파트 단지에 화원을 내면 장사가 잘 되었다. 남편은 대출을 받아서 지인이 하는 화원을 인수했다. 그런데 스마트폰이 나온 이후 사람들은 스마트폰하고 놀기 바빠서인지, 아니면 오랜 시간 정성을 쏟는 게 부담스러워서인지 분재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드물었다. 적자가 쌓여갈 즈음 건물이 경매에 넘어갔다.

  분재란 화초나 나무를 화분에 심어서 줄기나 가지를 보기 좋게 가꾸는 것이다. 부겐빌레아처럼 꽃을 보기 위한 상화분재도 있고 열매를 보기 위한 상과분재나 잎을 보기 위한 상엽분재도 있다. 어떤 분재든 팔리는 상품을 만들기까지 수년이 걸린다. 씨앗이나 묘목을 심는 단계부터 모양을 잡는 모든 단계에서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오랫동안 키운 분재를 헐값에 넘기고 남편은 일주일도 넘게 앓았다.

  나보다 화분에 심긴 식물을 더 사랑하는 것 같다고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도 남편 못지않게 남편이 가꾸는 식물들을 사랑했다. 야간작업을 주로 했던 건 남편이 화원에서 일하는 모습을 하루빨리 보고 싶어서였다. 내가 원단을 짜고 옷을 만들며 행복해했듯 남편은 꽃과 나무를 가꾸며 행복해 했다. 소망과 행복 같은 말들이 엄지와 함께 사라진 지금 나는 다만 생계를 걱정해야 한다.     

  수술을 반복한 지 90일째. 마침내 퇴원한다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부겐빌레아의 암시대로 열 번째 수술이 마지막 수술이 되었다. 퇴원 절차를 마친 남편이 병실에서 쓰던 물품을 담은 가방과 부겐빌레아 화분을 승합차 뒷좌석에 실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꽃잎이 죄다 떨어져 있었다. 하늘은 맑고 햇빛은 찬란했지만 떨어진 꽃들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

  “햇빛은 왜 이렇게 환한 거야.”

  내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햇살 아래 드러난 엄지손가락은 소름 끼치게 징그러웠다. 남편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일 그만하고 편하게 살라고 이런 일이 생겼다고 생각해. 앞으로 아무 일도 하지 마. 내가 다 할 테니.”

  “체, 일만 안 하면 행복한가? 당신은 내 맘을 몰라. 남편이라면서 어찌 그리 무심할 수 있지?”

  일하지 못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무서워서 어떤 도구도 쓰지 못할 거 같은 게 문제였다. 철심이 두 개나 박혀 있는 왼손 검지와 반만 남은 오른손 엄지. 내 손가락에 장해를 입힌 건 손가락의 기능을 높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기계였다.

  남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운전대만 잡고 있었다. 어느새 차가 집 앞에 와서 섰다. 석 달 만에 오는 집이다. 가슴이 울컥하며 뜨거운 게 목에 걸렸다. 남편의 뒤를 따라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남편이 점심상은 자기가 차릴 테니 앉아서 TV나 보고 있으라고 말했다. 거실 구석에 로봇 청소기와 청소용 물티슈가 쌓여 있었다. 물건들은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았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거 같기도 했다. 주부 없이 꾸려온 살림이니 오죽하겠는가. 나무들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적송의 모양이 좀 이상했다. 수령 20년이 넘는, 소담스러운 잎이 멋진 소나무는 나와 우리 가족이 제일 좋아하는 나무였다. 자세히 보니 왼쪽 가지가 반쯤 잘려 있었다. 내가 보는 방향에서 왼쪽이니 나무 입장에서는 오른쪽 가지가 잘린 셈이다. 튼실한 몸통에서 뻗어 나간 다섯 개의 가지 중 제일 높은 가지를 중지라고 치면 검지는 45도 정도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엄지는 바닥과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어 손가락을 쫙 펼친 손 모양이었다. 가지가 왼쪽으로 낮고 길게 뻗어 나가도록 오래오래 공을 들였는데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아니, 소나무가 왜 저래요? 가지가 왜 잘렸어요?”

  서둘러 안방으로 베란다로 다니며 나무들을 살폈다. 소나무 뿐만 아니라 다른 나무들도 모두 오른쪽 끝 가지가 반쯤 잘려 있었다. 둥치의 굴곡이 눈코입 모양이라 금방이라도 말을 할 것 같은

단풍나무도, 다섯 그루를 모아 심기 한 너도밤나무도, 빨간 열매가 예쁜 가막살나무도 오른쪽 가지가 잘려 있었다.

  “도대체 나무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소리를 지르며 남편을 노려보았다.

  “가지가 조금 잘렸다고 해서 나무들을 버릴 거야? 정성을 기울여서 더 잘 키우겠지?”

  남편이 온화한 눈길로 나를 보며 말했다.

  “나무를 이렇게 해 놓으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어요?”

  나는 적송 화분을 머리 위로 높이 쳐들었다. 남편이 후다닥 내게 달려오는 것과 동시에 현관문이 열렸다. 딸이었다. 남편이 빼앗듯이 화분을 받아서 TV 옆에 놓았다. 나는 천천히 팔을 내렸다. 나뭇가지는 다시 자라나겠지만 뭉툭하고 거무스름하며 꿰맨 자국이 가득한 징그러운 내 손은 영원히 제 모습을 찾지 못할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꽃이 모두 떨어져 버린 부겐빌레아처럼 내 마음도 한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은 내목에서 짓눌려 있던 울음이 통곡이 되어 터져 나왔다.

  “장갑이예요. 엄마한테 필요할 거 같아서요.”

  눈물에 젖은 내 눈앞에 살색 레이스 장갑을 들이밀며 딸이 말했다. (�한국소설� 2020년 3월호)

(한국소설, 2020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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