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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순 Feb 22. 2022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잊지 않기 위한 필사


내가 이 책을 어디서 샀더라. 광주에서였는지, 청주에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냥 한강의 신권인데다 제목, 책의 표지에 홀려 그대로 계산대로 들고 갔던 것 같다. 한강의 책을 많이 보진 않았다. 고등학교 때였나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 많이 우울했고, '소년이 온다'를 보다 말다 몇 번을 반복하다 끝내 아직도 다 보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시작한 '작별하지 않는다'는 처음엔 역시 조금 어려웠다.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의 흐름을 다 이해하지 못했고, 경하의 마음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근데 역시 책이란 모든 걸 세세하게 알아가려는 노력을 조금 덜 해도 된다는 걸 읽으면서 다시 느꼈다. 다만, 이 책은 제주 4·3 사건에 관련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배경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미리 공부를 하고 읽는 게 좋을 것 같다. 공부라고 말하면 너무 무거운 느낌이니 그냥 구글에서 나무위키 한 번 정도 정독하고 책을 읽으면 충분할 것 같다. 책을 읽는 동안 한 겨울의 제주도, 그 차가운 밤 눈더미 속에 파묻혀있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주위는 조용하고, 앞은 캄캄하고, 내 주위엔 온통 눈이 쌓여있는 그런 생생하고 밝은 어둠뿐이었다. 책을 다 읽은 후엔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이 이렇게 깊게 다가올 수 없었다. 끈질기게 기억하며 사랑하는 마음은 작별하지 않는 것과 같다. 







page. 57



거기 나오는 사람들, 아니, 그때 그곳에 실제로 있었던 사람들 말이야.


아니, 그곳뿐만 아니라 그 비슷한 일이 일어났던 모든 곳에 있었던 사람들 말이야.


총에 맞고,


몽둥이에 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 말이야.


얼마나 아팠을까?


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게 이만큼 아픈데.


그렇게 죽은 사람들 말이야,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몸 어딘가가 뚫리고 잘려나간 사람들 말이야.




page. 93



하나의 눈송이가 태어나려면 극미세한 먼지나 재의 입자가 필요하다고 어린 시절 나는 읽었다. 구름은 물분자들로만 이뤄져 있지 않다고, 수증기를 타고 지상에서 올라온 먼지와 재의 입자들로 가득하다고 했다. 두 개의 물분자가 구름 속에서 결속해 눈의 첫 결정을 이룰 때, 그 먼지나 재의 입자가 눈송이의 핵이 된다. 분자식에 따라 여섯 개의 가지를 가진 결정은 낙하하며 만나는 다른 결정들과 계속해서 결속한다. 구름과 땅 사이의 거리가 무한하다면 눈송이의 크기도 무한해질 테지만, 낙하 시간은 한 시간을 넘기지 못한다. 수많은 결속으로 생겨난 가지들 사이의 텅 빈 공간 때문에 눈송이는 가볍다. 그 공간으로 소리를 빨아들여 가두어서 실제로 주변을 고요하게 만든다. 가지들이 무한한 방향으로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어떤 색도 지니지 않고 희게 보인다.



겨울이 되고 눈이 내리면 이상하게 주위가 고요해지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특히, 눈오는 새벽 거리를 걸으면 차도 옆을 지나간대도 유독 내 숨소리만 크게 들린다. 이 부분을 읽고 네이버에 검색해 보니 눈이란 게 미세한 육각형의 결정체들이 모이고 모여 하나의 눈송이가 되는데 그 육각형 안쪽의 공간으로 주변의 소음들이 빨아들여져 고요함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눈이란 거 참 신기하다. 그 고요함이 겨울을 기다리게 만든다.




page. 109



눈처럼 가볍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눈에도 무게가 있다, 이 물방울만큼.


새처럼 가볍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것들에게도 무게가 있다. 


오른쪽 어깨 위, 스웨터 올 사이로 가칠가칠했던 아마의 두 발이 떠오른다. 내 왼손 집게손가락을 횃대 삼아 앉아 있던 아미의 가슴털은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이상하다, 살아 있는 것과 닿았던 감각은. 불에 데었던 것도,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닌데 살갗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page. 111



유난히 커다란 눈송이가 내 손등에 내려앉는다. 구름에서부터 천 미터 이상 거리를 떨어져내린 눈이다. 그사이 얼마나 여러 차례 결속했기에 이렇게 커졌을까? 그런데도 이토록 가벼울까. 이십 그램의 눈송이가 존재한다면 얼마나 커다랗게 펼쳐진 형상일까.




page. 129



나무들의 키와 윤곽으로 미루어 삼나무 숲을 지나고 있는 듯했다. 지난해 가을, 목작업을 하는 인선을 두고 정류장까지 산책 나왔다 돌아가는 길이면 키 큰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천이 스치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내가 느끼기에 이 섬의 바람은 마치 배음처럼 언제나 깔려 있는 무엇이었다. 거세게 몰아치든 온화하게 나무를 쓸고 가든, 드물게 침묵할 때조차 그것의 존재가 느껴졌다. 특히 침엽수들과 아열대 활엽수들이 섞여 자라는 구간에서는, 수종에 따라 다른 속도와 리듬으로 가지와 잎사귀들 사이를 통과하며 형용 못할 화음을 만들었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동백 잎사귀들이 매 순간 각도를 바꾸며 햇빛을 되쏘았다. 




page. 260



나의 동생 정심에게



내가 나가면 너는 스물한 살 정숙이는 스물다섯 나는 스물여덟 아니냐 보고 싶은 마음이야 당연하지마는 눈물 흘릴 것이 무어 있나 쇠털같이 많은 날을 만나 옛이야기 할 수 있는데 정숙이한테 그리 일러주어라




page. 267



호송차 여러 대에 올라타기 시작하는데 줄 뒤쪽에서 젊은 여자가 아니메, 아니메, 하고 울부짖었습니다. 굶주려 그랬는지, 무슨 병을 앓았는지 배에서 숨이 끊어진 젖먹이를 젖은 부두에 놓고 가라고 경찰이 명령한 겁니다. 그렇게 못한다고 여자가 몸부림 치는데, 경찰 둘이 강보째 빼앗아 바닥에 내려놓고 여자를 앞으로 끌고 가 호송차에 실었어요.


이상한 일입니다. 내가 그 말 못할 고문 당한 것보다······ 억울한 징역 산 것보다 그 여자 목소리가 가끔 생각납니다. 그때 줄 맞춰 걷던 천 명 넘는 사람들이 모두 그 강보를 돌아보던 것도.




page. 316



낮에는 공방에서 나무를 깎고, 밤이면 안채로 돌아와 구술 증언 자료들을 읽었어. 자료마다 다른 사망자들의 데이터를 대조해 확정했어. 오십 년 봉인이 해제된 후 접근 가능해진 미군 기록물들과 당시 언론 보도, 1948년과 1949년에 재판 없이 수감된 제주 수형인 명부와 보도연맹 학살 사이에서 사건들을 복기했어. 자료가 쌓여가며 윤곽이 선명해지던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가 변형되는 걸 느꼈어.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빡이는······


그게 엄마가 다녀온 곳이라는 걸 나는 알았어. 악몽에서 깨어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면, 그 얼굴에 끈질기게 새겨져 있던 무엇인가가 내 얼굴에서도 배어나오고 있었으니까. 믿을 수 없는 건 날마다 햇빛이 돌아온다는 거였어. 꿈의 잔상 속에 숲으로 걸어나가면, 잔혹할 만큼 아름다운 빛이 나뭇잎 사이로 파고들며 수천수만의 빛점을 만들고 있었어. 뼈들의 형상이 그 동그라미들 위로 어른거렸어. 활주로 아래 구덩이 속에서 무릎을 구부린 키 작은 사람을, 그 사람뿐 아니라 그 곁에 누운 모든 사람들이 살과 얼굴을 입는 환영을 그 빛 속에서 봤어. 흑백이 아니라 선혈로 얼룩진 옷을 입고 그 구덩이 속에, 방금까지 살아 있었던 부드러운 어깨와 팔과 다리로.


···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


그 아이들.


절멸을 위해 죽인 아이들.


그 아이들을 생각하다 집을 나선 밤이었어. 태풍이 올 리 없는 10월이었는데 돌풍이 숲을 지나가고 있었어. 달을 삼켰다 뱉으며 구름들이 달리고, 별들이 쏟아질 듯 무더기로 빛나고, 모든 나무들이 뽑힐 듯 몸부림쳤어. 가지들이 불같이 일어서 날리고, 점퍼 속으로 풍선처럼 부푸는 바람이 거의 내 몸을 들어올리려고 했어. 한 발씩 힘껏 땅을 디디고 그 바람을 가르며 걷던 한순간 생각했어. 그들이 왔구나.


무섭지 않았어. 아니,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행복했어. 고통인지 황홀인지 모를 이상한 격정 속에서 그 차가운 바람을, 바람의 몸을 입은 사람들을 가르며 걸었어.


···


심장이 쪼개질 것같이 격렬하고 기이한 기쁨 속에서 생각했어. 너와 하기로 한 일을 이제 시작할 수 있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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