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하학으로 가는 길에 왕도는 없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당시 나에게는 말을 잘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다. 그래서 거금을 주고 동네 스피치 학원의 개인교습을 등록했다. 그렇게 스피치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나에게 과제를 내주고, 연습을 시켰다. 선생님은 매 수업 때마다 거듭 강조하시는 것이 있었다. 책을 많이 읽어라, 경험을 많이 해봐라,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파악해라. 이 세 가지였다.
나는 선생님이 이 세 가지를 강조할 때마다 옳은 말씀이라며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하지만 사실 크게 공감하지 못했다. 나는 이미 스스로 책을 많이 읽는다고 생각했다. 회사일이 바빠서 당장은 다양한 경험을 할 시간이 없다고 여겼다. 사회가 돌아가는 방향인 정치 문제나 트렌드도 뭐 굳이 알아야 하나 싶었다. 이런 나의 생각을 살짝 내비쳤더니 선생님은 세 가지 책을 추천해주셨다.
박웅현 작가의 '여덟 단어', 김진명 작가의 '사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다. 당시 나는 주로 자기 계발서만을 읽었다. 선생님은 내가 좀 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도록 인문학을 접하게 하고, 사회적인 이슈를 반영한 소설을 추천했으며, 문학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경험을 깨닫게 해주려고 하신 것 같다. 수업 막바지에 추천받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제외하고는 전부 열심히 읽고 선생님과 내용을 토론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선생님과 좋은 추억도 만들고, 스피치를 할 기회를 제공받기도 했으며, 말하는 기술이 늘기도 했다. 수업이 끝났을 때, 비싼 수업료가 아깝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느낌이었다. 나는 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우면, 말을 잘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수업 중에 그렇게 특별한 방법, 비결 등을 얻지는 못했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고 회사일에 찌들면서 스피치에 대한 욕구는 거의 다 사그라들었고, 직업 특성상 스피치를 할 일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렇게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불현듯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보다 경험도 조금 생기고, 독서의 범위도 조금 더 넓어진 지금에서야 하나 둘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선생님께 배운 내용들, 선생님이 강조한 내용들이 스피치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여러 가지 경험을 했으며, 사회적 이슈와 트렌드를 잘 알고 있으면, 할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를 선생님과 함께한 토론처럼, 내용을 정리하고 나만의 생각을 가미하여 사람들에게 잘 표현하면 그것이 스피치인 것이다. 그러니까 선생님에게 배운 스피치는 정도(正道)였다. 그리고 당시 내가 원하던 것은 지름길, 왕도(王道)였다. 그 옛날 기하학의 아버지, 유클리드가 한 말이 떠오른다.
"기하학으로 가는 길에 왕도(王道)는 없습니다."
기원전 300년 경의 고대 그리스 학자 유클리드는 기하학을 집대성한 사람이다. 도형의 성질을 다루는 수학의 분야인 기하학은 토지 측량 기술 등 실제 생활에서 응용할만한 일이 많았기에 고대 이집트서부터 피타고라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 학자들까지 많은 지식들이 이미 존재해왔다. 유클리드는 이 모든 지식들을 집대성하여 '원론(Stoicheia)'을 저술한다.
'원론(Stoicheia)'은 2천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서양 수학의 주 교과서로 쓰이며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다. 어떻게 이런 엄청난 책을 쓸 수 있었을까. 유클리드는 이전 학자들이 남겨놓은 여러 이론들을 하나하나 세분화하고, 재배열하여 논리적인 학문체계를 확립했다. 이론 하나하나를 파고들어 그 핵심을 얻고, 이를 통해 전체를 정교하게 연결시킴으로써 기하학이라는 학문을 탄생시켰다.
유클리드의 주 활동무대는 알렉산드리아였고, 이 곳은 알렉산더의 후계자 중 한 명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다스리고 있었다. 기하학 공부에 몰두하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유클리드를 극진히 대우하며 물었다.
"기하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지만 쉽지 않습니다. 기하학을 쉽게 배우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유클리드는 이렇게 대답했다.
"왕이시여, 기하학으로 가는 길에 왕도(王道)는 없습니다."
유클리드는 학문의 완성에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전 학자들의 학문적 유산을 성실하고, 끈기 있게 쌓아 올린 덕분에 완성된 것이 기하학이었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름길과 같이 편하고, 쉽고, 특별한 길을 찾는다면 거기에는 조급함만이 있을 뿐이다. 빨리 스킬을 얻어 이를 과시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제대로 된 성취의 기쁨을 느낄 수 없다.
아마 지금 다시 스피치를 배운다면 당시보다 훨씬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때보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있고, 경험도 더 많이 쌓였다. 사회적 이슈와 트렌드는 여전히 어두운 편이나 역시 그때보다는 낫다. 하지만 무엇보다 당시 조급함만을 가지고 있던 나보다, 정도(正道)를 묵묵히 걸을 수 있는 인내심이 좀 더 생겼기 때문이다. 유클리드와 같이 성실하고, 끈기 있고, 우직하게 정도(正道)를 걷는 것이 사실은 가장 빠른 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