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서비스만 동작하는 가상환경을 구축하던 중 문제가 발생했다. 스크립트로만 동작하는 환경이라 사용자 입력도 없고 시스템 활동도 제한적인 상태였다. 서비스가 갑자기 멈춰버렸고, 원인을 추적해 보니 난수 생성에서 멈춰있었다. 엔트로피, 즉 시스템의 무질서도가 너무 낮았던 것이다.
컴퓨터 시스템에서 난수는 보안을 위한 암호화나 다양한 시뮬레이션에 필수적이다. 이런 난수를 생성하기 위해서는 예측 불가능한 요소들이 필요한데, 키보드 입력, 마우스 움직임, 하드웨어 인터럽트 같은 것들이 그 재료가 된다. 하지만 가상환경은 너무나 완벽하게 통제된 공간이라 이런 무질서한 요소들이 부족했다. 그 결과, 시스템은 멈췄다.
헤겔은 말했다. 정반합의 변증법에서 질서(정)와 무질서(반)는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라고. 이 경험은 나에게 비슷한 깨달음을 주었다. 우리는 흔히 질서만을 좋은 것이라 생각한다. 계획적이고 규칙적인 삶이 이상적이라 믿는다. 하지만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예상치 못한 일, 계획에 없던 순간, 뜻밖의 만남. 이런 작고 무질서한 요소들이 삶의 엔트로피를 구성한다. 그 엔트로피가 삶을 보다 풍요롭게 만든다. 매일이 똑같다면 새로운 생각도, 감정도, 성장도 없다. 작은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나는 변화하고, 스스로를 재정립하며, 더 큰 조화를 찾아간다.
완벽하게 통제된 가상환경이 시스템을 멈추게 했듯, 완벽하게 통제된 삶은 나를 정체시킬지도 모른다. 예측 불가능한 만남, 계획에 없던 경험, 뜻밖의 순간들. 이런 작은 무질서들이 우리 삶에 필요한 엔트로피가 되어주는 게 아닐까. 헤겔이 말한 조화는 질서와 무질서의 균형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데 있다. 계획과 우연이 조화를 이루는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예상하지 못했던 나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