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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을 꿈꾸는 청춘

by 검둥새

청춘의 끝자락에 서있는 후배 한 명이 뜬금없이 이런 말을 꺼낸 적이 있다. 빨리 불혹이 되고 싶다고.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전혀 감추지 않고 쳐다보았다. 이건 또 무슨 멍멍이 소리일까. 후배는 빠르게 변명했다. 자신은 아직 기복이 심하고 여러 방면에서 미숙한데, 불혹쯤 되면 안정감이 생기고 다방면에서 능숙해 보이지 않겠냐는 것이다.


생각보다 깊은 고민이 담겨 있고, 한편으로는 철없는 소리 같기도 해서 너털웃음을 지었던 기억이 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묘한 느낌이 든다. 불혹에 근접한 나라고 능숙해지는 중인가. 아직 많이 모자라다고 느끼는데. 다만 저 후배 나이 시절의 나보다 좀 더 안정적이고, 좀 더 능숙할 뿐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조건 속에 던져진 존재라고 보았다. 자신이 미숙하고 기복이 심하다고 느끼는 후배는 세상에 던져진 상태다. 자신이 원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당장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동시에 그는 인간을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던지는 존재로도 파악했다. 후배가 불혹의 능숙함을 갈망하는 것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던져짐과 던짐, 이 두 측면은 따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던져진 조건 속에서만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렇게 자신을 던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다시 새로운 조건 속으로 던져진다.


불혹에 가까운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다. 그 옛날 청춘의 나보다 '좀 더 안정적이고 능숙한' 상태 역시 과거의 무수한 선택과 경험들이 쌓여 만들어진 조건이다. 내가 의도적으로 계획해서 이룬 것이라기보다는, 매 순간 던져짐과 던짐을 반복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더 나은 나'를 향해 나 스스로를 던지고 있다. 불혹이라는 단계도 청춘보다 던져짐과 던짐의 연속을 좀 더 많이 반복했을 뿐, 완성의 단계는 아니라는 말이다.


후배에게는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네가 아직 청춘이라 그런 생각도 할 수 있는 거라고 핀잔을 주고는, 그래도 미숙함을 겪어가는 과정이 있어야 지금보다는 좀 더 능숙해지지 않겠냐고.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튀어나온 말치고는 나쁘지 않은 대답이다. 미숙함과 상대적으로 능숙함, 청춘과 불혹, 이는 모두 과정일 뿐, 도달점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청춘은 기나긴 여정의 초입에서 느끼는 특별한 설렘과 불안이 아직은 공존하는 시기고, 불혹은 그 여정의 한 지점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시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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