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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석 Jun 14. 2024

인서울 대학을 가면 BMW를 사줄게

고3. 38등에서 3등까지의 여정

고3에 올라가기 전, 실용음악과를 준비하고 있는 나에게 아버지가 약속한 공약이 하나 있었다.


"인서울 대학교에 가면 BMW를 사줄게"


인서울이라 표현했지만,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는 대학에 합격하면 BMW에서 나온 SUV(X5)를 사주겠다는 것이었다. 큰돈을 날리고도 이런 공약을 할 수 있을 만큼 아버지는 참 호방한 사람이었다. 그 호방함을 볼 수 있는 사례가 더 있는데, 고1 때부터 담배를 피우던 나에게 좋은 담배를 펴야 한다고 하시며 마일드세븐을 한 보루씩 사서 같이 나눠 폈던 추억도 있다.


아버지의 공약은 다분히 현실적이었다. 재능이 있는 아이들은 입시를 치르기 전에 해당 악기 분야에서 어느 정도 이름을 날리기 마련이다. 실기 시험 때 교수님과 같이 즉흥연주를 제안받아 연주를 함께 하고 최종 합격을 하는 사례도 있었다.


음악에 특출 난 재능을 보이지도 못했고, 음악 아니면 안 된다고 할 정도의 절실함 또한 없었기 때문에 진로를 수정하는 게 다분히 합리적이었다. 아버지는 BMW 제안 외에도 음악은 대학교 가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여러 가지 사례들을 제시해 주셨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버지는 똑똑한 사람이셨기 때문에 꽤나 논리적으로 나를 설득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장난 같은 공약은 내 인생 전체를 바꿔놓았다.




이 글을 쓰며 지나왔던 일들을 돌이켜 보니 인생의 퀀텀 점프의 순간이 3번 있었는데, 수능이 그중 하나였다.


난 말 그대로 사교육이 만들어낸 결정체였다. 고3을 앞둔 겨울방학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아무런 기초도 없었기 때문에 수학을 제외한 언어, 사탐, 과탐, 외국어 모든 과목을 당시 유행하던 메가스터디에 등록했다(아직도 기억나는 해오름, 손사탐, 이범, 김기훈 선생님은 잘 계실까 모르겠다). 신기하게도 제대로 한 건 처음이었던 공부지만 꽤나 열심히 했다. 스톱워치를 목에 걸고 하루 공부 분량을 13시간을 채웠고, 침대 매트리스를 치우고 대신 문제집을 깔았다. 왜 갑자기 그렇게 처절했는지 모르겠다. 단순히 BMW SUV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었던 거 같고 하다 보니 관성이 붙었고 나 자신을 계속 이기고 싶었던 거 같다.


수학 관련해서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당시 서울대학교에 다니던 선생님에게 과외를 받고 있었는데, 고3 첫 모의고사 수학 점수가 8점(당시 만점은 80점)이었다. 시험 볼 때 열심히 풀었는데 8점이 나오다니... 차라리 찍었더라면 12점은 나왔을 텐데... 결국 수학과외도 중단하고 메가스터디를 등록했다.


과외 선생님은 나중에 형님이 되어 같은 회사(EY 한영회계법인)에 다니게 되었다. 그렇게 공부 잘하던 과외 선생님과 같은 회사를 다니게 되다니!! 정말 사람 일은 모르는 일이다. 형님과 회사 라운지에서 추억팔이를 하며 이야기해 보니 당시 내가 공부하던 모습을 보고 '저렇게 처절하면 어떻게든 잘 되겠구나' 하면서 떠났다 하셨다.


처음 본 고3 모의고사의 전체 성적은 반 43명 중 38등이었는데 불안하지 않았다. 머릿속을 채운 생각이라곤 '내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라는 것이었다. 초조하지도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학생들 대비 공부량이 압도적인 것을 알았던 거 같다. 생각보다 열심히 하는 친구들이 없었다.


주위 환경도 한 몫했던 거 같다. 1년 유급한 학생이 공부를 하다 보니 선생님들이 편의를 많이 봐주셨다. 잠에 취해 귀걸이를 단 채로 등교를 해도 못 본 체 봐주셨고, 몰래 핀 담배 냄새가 교실에서 풍겨도 그냥 넘어가주신 적도 있었다. 학교의 보강 수업은 어떻게든 빠지려 했고, 그 시간을 메가스터디 특강과 개인 공부로 가득 채웠다.


게다가 난 같은 반 친구들에게 형이었다. 모르는 문제들이 있으면 반에서 1,2 등 하는 동생들에게 부담 없이 질문했고 공부 잘하는 동생들은 한 살 많은 형에게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그렇게 고3시절을 보내고 수능을 치렀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재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성적이 올라가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경희대 철학과에 지원하여 논술을 앞두고 있었지만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래서 대여했던 일본 만화책인 원피스(One Piece)를 반납한다는 핑계로 논술 시험장에 늦게 들어갔고, 결국은 탈락해서 재수의 길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만화책 반납 때문에 논술고사를 지각한 나를 보며 땅을 치셨다.


항상 무언가를 혼자 하는 걸 좋아했던 거 같다. 재수 종합반은 여름 방학 때 2달 정도만 다녔고, 혼자 인터넷 강의를 들으면서 수능을 준비했다. 어찌 되었든 결과는 혼자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부모님도, 배우자도 그 시간을 함께 해 줄 수 없다. 외롭고 힘든 일을 겪어야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렇게 1년 뒤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에 합격했다. 수능 점수로는 반에서 3등 정도의 성적이었다. 나이로는 삼수생이라 하향지원을 해서 합격을 예상하긴 했다. 강남역에서 23일 연속 술을 마시고 취해있는 상태에서 합격 문자를 받았는데, 기억나는 거라곤 부모님이 정말 좋아하셨다는 것이다. 나중에 사촌에게 건너 들으니 아버지도 감격한 목소리로 큰아버지에게 전화를 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BMW SUV를 받지는 못했다. 집 사정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고 대학에 갓 입학한 나에게 수입차를 사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더 큰 자산을 얻었다. 무엇보다 나라는 인간이 목표를 품으면 물고 놓지 않은 독한 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걸 걸고 베팅하면 어떤 영역에서든 2년 정도의 시간 뒤에는, 본 게임에 참가할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난 어떻게든 잘 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걸 알게 된 거 같다. 그래서 성인이 된 후에도 이와 비슷한 2번의 성공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학 입학 전 성인을 앞둔 나에겐 정말 지옥 같은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건강과 집안의 경제적 여건은 점점 안 좋아져만 가고 있었다. 그렇게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아무것도 모른 채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




<사족의 글>


에세이를 쓰면서 어려운 일은

감정선을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것인 거 같습니다.


아버지를 모신지도 벌써 4개월이 되어 갑니다.

슬픔에 허우적거리던 저의 감정도

어느덧 안정을 찾아가고 미래를 보기 시작합니다.


훈련된 글쟁이가 아니어서.

글을 많이 쓰던 사람이 아니어서.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 요즘은 고민이 됩니다.


처음의 호흡을 그대로 가져가야 하는지.

감정의 변화가 글에 나타나야 좋은 건지.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싶지만

적정선을 제가 잘 찾아야 하겠지요.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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