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대를 속이면 분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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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을 준비했던 2009년은 세계 금융 위기의 여파가 남아있는 시기였다.
나는 누가 봐도 취업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학점이 너무 안 좋아서 흔히 하는 복수전공 조차 할 수 없었다.
삼수 나이에 입학했는데 학점이 안 좋고,
군대는 면제인데 휴학을 했고,
더군다나 그 시간 동안 뭘 했는지도 모르겠고,
졸업이 늦었는데 전공도 역사학과 단일 전공 이라니.
커리어를 위해 무엇하나 쌓아온 것이 없어서, 내가 인사팀이더라도 자기소개서를 보지도 않고 불합격을 결정했을 것 같다. 경제, 경영학과를 전공한 학점이 좋은 친구들조차 취업이 쉽지 않은 시기였다. 40여 개 회사에 지원했지만 단 한 곳도 서류통과조차 한 곳이 없었다.
과연 나는 회사에서 판단하기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만신창이가 된 이력서를 구제하기 위해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결국 선택한 방법은 대학원 입학이었다. 취업에 도움이 되는 학과를 전공해서 학점을 잘 받으면, 대기업은 아니지만 중견기업이라도 지원할 수 있을 거 같았다.
하지만 지원했던 모든 대학원에 불합격했다. 심지어 모교인 성균관대학교에서 조차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도대체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아프신 부모님, 갚아야 할 부채, 망가져 버린 스펙, 적지 않은 나이.
그냥 공사판에서 막노동이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2010년 2월의 어느 날. 술을 먹고 뻗어있는 나에게 전화가 왔다. 성균관대학교 입학 담당자였다. 스팸 전화인 줄 알고 몇 번을 받지 않았는데, 숙취에 정신이 없어서 받았다. 입학 담당자는 도대체 몇 번을 전화했는데 왜 전화를 받지 않느냐며 핀잔을 주더니 물었다.
"추가 합격자 자리가 하나 있는데 아직 입학하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숙취에 어지러웠지만 얼떨결에 '네'라고 대답했던 거 같다. 생각해 보니 학사나 석사나 언제나 합격할 땐 취해있는 상태였다.
2010년 3월. 난 이것이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는 비장한 각오를 품고 모교인 성균관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에 입학했다.
살기 위한 공부가 시작되었다. 수능을 본 지 6년이 지났고 그동안 공부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데 다시 잘 해낼 수 있을까. 손에 드럼 스틱이 아닌 펜을 잡는 게 이상하리만큼 낯설었다.
학교 앞 하숙집 월세는 13만 원이었다. 3층짜리 흰색 빌라였는데 곰팡이로 뒤덮여 있어 흰색처럼 보이지 않는, 이상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빌딩이었다. 실내 벽에 곰팡이가 심해져서 아주머니에게 이야기하니, 아주머니는 벽지를 다시 바꿀 일이 없도록 벽을 곰팡이 색으로 도배해 주셨다. 공용화장실은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아 하숙집 옆 헬스장에서 씻었다. 대학원 친구는 골목에서 벽을 밀면 방이 나오는 모습을 보며 놀라더니 수고한다며 그날 와플을 사줬다.
고시생들이 흔히 말하는 세븐일레븐을 했다. 아침 7시 공부시작 밤 11시 귀가를 뜻했다. 아직도 그 루틴이 선명하다. 2년 동안 나의 일과는, 6시에 헬스장에 가서 운동하고 씻고, 정문 앞 공씨네주먹밥 1000원짜리에 500원짜리 계란프라이를 추가해서 먹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서관 자판기에서 500원짜리 노란색 조지아 맥스 캔커피를 들고 들어가 7시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점심 저녁은 생활스터디 하는 친구들과 학생 식당에서 먹었고 11시에 경영관 앞에서 만나 하교를 했다.
부모님의 건강은 안 좋아져만 갔다. 특히 아버지의 건강이 안 좋아지셨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부정적인 반응을 하는 하셨고 말할 때마다 죽음을 이야기하셨다.
난 결정을 했다. 모두가 지쳐있었다. 아버지가 집에 계속 있으면 어머니도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진료를 명목으로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갔다. 병원은 폐쇄병동이었고 그날 난 내 손으로 아버지를 강제입원 시켰다. 건장한 남자 2명이 아버지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보며 어머니는 통곡을 하셨다. 하지만 난 울 수 없었다. 여기서 내가 무너지면 모든 게 끝나버릴 거 같았다. 폐쇄병동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 손으로 아버지를 내 가슴에 한편에 묻었다.
'아빠 미안해. 가족을 살리려면 어쩔 수 없다. 우리 좀 살자.'
어머니를 집에 모셔다 드리고 그제야 집 앞의 산에 올라 울면서 소리 없는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난 그날도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당시 세이노 선생님의 글을 제본해서 가지고 다녔다. 아직도 <삶이 그대를 속이면 분노하라>라는 글의
'내 삶은 수제비로 범벅이 되어 있는데'라는 문장이 기억난다. 정말이지 내 삶은 수제비로 범벅이 된 거 같았다.
여담이지만 며칠 후 큰아버지의 반대로 아버지는 폐쇄병원에서 나와 분당서울대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야속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이만 줄인다.
그렇게 2년 동안 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경영전문대학교 회계학과의 석사학위를 받았다. CFA라는 자격증의 Level 2를 Pass 하고, 미국공인회계사(USCPA)에 합격했다. 학점은 5점 만점에 4.2 정도 받았던 거 같고, 논문도 꽤 좋은 평가를 받아 국내 회계 분야에서 가장 저명한 곳인 한국회계저널에 등재되었다. 지도 교수님은 내심 해외 박사과정을 원하시는 눈치셨다. 공부에 탄력을 받고 박사과정에 대한 욕심도 생기기 시작했지만, 난 이제 돈을 벌어야 했다.
2년간의 시간은 나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어느 때보다 자신감에 충만해 있었다. 가고 싶은 회사에만 원서를 썼다. 토익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지원서에 토익 점수도 제출하지 않았다. (사실 점수가 없는 줄 알았는데 875점짜리 점수가 있긴 했었다)
회사들이 2년 전 나에게서 보았던 모든 단점들은 이제 모두 장점이 되어있었다. 정신 못 차리고 음악에 몰두할 만큼 하나의 일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부모님의 건강 문제에도 불구하고 대학원에서 시간을 잘 보낼 만큼 강한 사람이었다. 역사를 전공해 인문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재무회계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한다고 결심해서 인생을 바꾼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면접 때 뇌졸중으로 군대 면제받은 거에 대해 업무에 지장은 없을지 면접관이 물어보았는데 옆에 있는 임원이 대신 대답했다.
"대학원 학점도 그렇고 자격증을 이렇게 땄는데 건강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할 수 있었겠어?"
시간을 아름답게 보낸다는 말은 그런 건가 보다. 단순하게 하나를 파고들어 집요하리만큼 파고드는 것. 그러면 그 시간은 말로 하지 않아도 치열한 시간을 보낸 사람들에겐 그냥 느껴질 수밖에 없나 보다.
난 대형 회계법인 중 한 곳에서 컨설팅을 시작하게 되었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
한 명의 힘든 사람이 있더라도 가정 전체가 힘들어질 수 있다. 사람의 부정적인 기운은 블랙홀 같아 그만큼 주위에 부정적인 영향력을 주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빨아들인다. 이때 중요한 건, 가정의 구성원 중 그 힘든 상황을 극복하고 소위말해 '멱살 잡고 끌고 갈 수 있는 한 사람'이 있느냐의 여부이다. 그 당시 내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독함이 있었음에 하늘에 감사드린다.
아버지에게 죄송하다. 그때 일을 두고 미안하다 한마디 하지 못했다.
아빠 미안하다.
이 글을 빌어 부족한 저에게 기회를 주신
모교 성균관대학교와 입학담당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