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석 Jun 21. 2024

비극에도 가속도가 있었다

"이젠 정말 내가 가장이구나"

만약 대학 시절로 돌아가 그때의 일들을 다시 겪어보라 한다면 버틸 수 있을까? 아마도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모두 알고 있는 지금에서는, 다시 해보라면 못 할 거 같다.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해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음악을 할 수 있는 동아리를 찾는 것이었다. 이제 인서울 대학교도 들어갔으니 실용음악과를 준비하다 중단했었던 악기(내가 전공을 준비했던 악기는 드럼이었다)를 원 없이 해보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동아리를 알아보는 중 학생회관에 지나가는데 악기들을 꺼내놓고 잼(즉흥연주)을 하는 동아리가 있었다. 재즈 연주 동아리 GrooV였다.


'어..?? 이 사람들 음악에 진심인데..??'


이 동아리는 뭔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특이한 이방인들이 모인 집합소 같았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남들의 시선에 그리 집착하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음악을 정말 진심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아직도 음악씬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가장 유명한 친구로는 지훈이(스윙스)가 있는데 몇 번 드럼 레슨을 해줄 때만 해도 이 친구가 이렇게 이름을 날릴 줄은 몰랐었다.


이곳에서 정말 음악에 빠져들었다. 매일 술을 마시고 음악을 듣고 악기를 연주했다. 당연히 공부는 뒷전이었기에 매번 학고를 간신히 면하는 수준이었다. 학점이 워낙 좋지 않아 학부를 6년간 다녔는데(뇌졸중으로 인해 군대는 면제를 받았다), 졸업하는 시점에는 내 뒤에 몇 명 있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난 정말 열심히 연습했다. 하루 8시간은 꾸준히 했던 거 같다. 그때 알게 되었다. 정말 음악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같이 연습실을 다니던 드러머들은 내가 공부를 잘하고 악기도 잘한다고 이야기해 줬지만, 애초에 내 비교 대상은 전공생이었다. 그들과 비교해서는 한참 부족한 실력이었고, 연습양에 비해서 실력이 정말 잘 안 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3부터라도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참 잘한 일이었다.




아버지의 건강과 집안의 경제적 여건은 점점 안 좋아져만 갔다. 아버지는 건강이 악화되며 내가 대학을 다닐 때 즈음엔 경제활동과 사회활동을 완전히 중단하셨다. 대출이 8억 정도 있었는데 금리가 8%대였고 이자가 한 달에 500만 원 이상 발생하고 있었다. 내가 저 빚을 다 갚을 수 있을까. 파산신청도 생각해 보았지만 가지고 있는 자산을 합해보니 빚보다는 많아서 더 버텨보기로 했다.


하지만 계속 반포에 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당시 신도시(동백지구)의 전세가 쌌기 때문에 부모님은 그곳으로 이사를 하시고 나는 학교 앞 작은 원룸을 구해 자취를 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흩어져서 얼마간 겉으로 보기엔 평화로워 보이는 시간이 흘렀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아직도 이런 조용한 시간이 불안하다. 무언가 치열하게 하고 있지 않으면 어떤 생각지도 못 한 비극이 생길 거 같다.


정신질환은 마음의 병이지만 마치 독감같이 전염성이 있다. 오랜 기간 아버지의 옆에 계셨던 어머니는 점점 마음의 병이 들기 시작하셨고, 갱년기와 함께 완전히 무너지셨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서 아버지와 둘이 지내시려니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학교 앞 원룸에서 생활하던 중 어머니가 이상하다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집에 가 보았다. 도착해서 집에 들어간 순간 난 정말이지 망연자실해 버렸다. 식탁이 쓰레기장에 버려지고 옷과 책이 바닥에 널브러져 엉망이 된 집 안에서 난 한참을 혼자 멍하니 서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내게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이런 변화들은 알게 모르게 천천히 발생한다. 큰돈을 잃는다고 하더라도 당장 생활이 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정신을 차려보면 완전히 예전과는 다른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내 경우에는 어머니의 우울증이 그것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던 거 같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으로 어떤 일을 해결하지 않고 방치한 채 시간을 보내게 되면 무엇이든 더 악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비극이라는 것은 관성이 있어서 '더 안 좋은 일이 있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때 항상 더 힘든 일이 찾아온다. 10여 년간 길러오던 코카스페니엘 강아지 '샤론'이 어딘가 아픈 거 같아 병원에 데려가니 후두암 말기였다. 수술을 했지만 2주 만에 세상을 떠났다.


화장을 할 돈이 아쉬워 혼자 삽을 하나 사들고 동네 산에 올라가 샤론을 묻어줬다. 직접 묻어주고 싶은 감성에 취했던 건지도 모른다. 한겨울이라 땅이 얼어붙어 삽이 들어가지 않았다. 울면서 삽질을 하다 쉬기를 반복하며 한참만에 샤론을 묻는 데 성공했다. 흙을 덮으며 생각했다. 정말 미안하지만 우리 집에 생기는 이 안 좋은 일들을 다 가지고 가 달라고..


욱신거리는 몸으로 삽을 들고 산을 내려오며 하늘을 보니 해가 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젠 내가 정말 가장이구나"


의지할 곳이라곤 아무 곳도 없었다. 피가 섞인 가족은 언제나 같은 편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평화로운 시절의 이야기다. 친척들 역시 최악의 순간에는 그들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도와주지 않는다. 그들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다. 그 순간만큼은 당사자들이 헤쳐나가야만 한다. 난 그래서 아직도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때부터 내 인생의 목표는 예전 살던 곳에서 예전처럼 사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평범한 방법으로는 불가능해 보였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




장례식장에서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던 지인들은 GrooV에서 같이 연주하던 친구들이었다.


그렇게 특이했던 친구들은 어느덧 성인이 되어, 대기업을 다니는 친구도 있고 학교 앞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친구도 있다. 술에 취해 학교 잔디밭에서 Stealheart의 'She's Gone'을 목청껏 불렀던 친구는 철학과 교수를 하고 있다. 삭발하거나 파마를 하고 동아리방에서 술에 취해 연주하며 담배를 피우던 인간들이,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아버지와 나에게 절을 하고 있다니. 시간이라는 게 정말 깡패 같다.


방금 그 시절이 생각나 MILES DAVIS의 Kind Of Blue 앨범을 재생시켰다. 새삼 이렇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환경이 참 감사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