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작은페미니즘학교 2기 졸업생에게
2기 졸업생 여러분, 진심으로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진심으로라는 말에 참 여러 가지 의미가 떠오르네요. 어려운 책 당분간 안 읽어도 되니, 에세이 안 써도 되니, 발제 안 해도 되니 등등을 함축하고 있는 진심인 줄 졸업생들이 더 잘 아시겠지요. 게다가 저, 탕아에게, 제가 1기 졸업생이라는 이유로 축사를 할 영광을 누리게 해 주시다니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이제 내년엔 이 역할이 곧 2기 여러분 몫이라는 것도 잘 아시리라 믿고요.
축하는 조금 미뤄두고 제 얘기를 해보려 합니다. 작년부터 주력해 온 분야가 있습니다. 바로 오르막 달리기예요. 요즘은 달리지는 않고 좀 더 높고 가파른 능선들을 오래 걷습니다. 오르막을 걷거나 뛰다 보니 요령이 생기더라고요. 생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호흡이 가빠져서 어떻게든 그 상황을 버텨야 하니까요. 타고난 지구력 혹은 자존심 때문에 중도에서 그만두길 잘 못합니다. 그래서 버텨야 해요. 버티려면 에너지를 비축해야 합니다. 보폭을 줄여야 하고 더 자주 발을 바꿔줘야 해요. 오르막을 단숨에 오르고 싶은 생각에 보폭을 넓게 해서 두 걸음에 갈 바위와 바위 사이를 한 걸음에 내딛으면 그땐 모르지만 금방 사달이 납니다. 이내 속도가 쳐지고 몸이 무거워져서 결국 엉덩이를 쭉 내밀고 중력을 고스란히 받아 안은 채 걷게 됩니다. 전 예전에 산행을 할 때는 주로 치고 올라가는 편이었어요. 산을 오를 때 멀리 보지 않아도 된다는 걸, 빨리 가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아주 늦게 알았어요. 어떻게 알게 되었냐면, 산을 잘 타지 못하는 친구와 동행했기 때문이죠. 가끔은 앞사람의 뒤꿈치만 보고 올라가야 할 때가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습니다. 제가 요즘 즐겨보는 예능 중에 ‘골 때리는 그녀들’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비전문 여성축구선수들이 등장하는데요, 거기서 언니들이 계속 소리쳐요. “잔발~~~~~~~!” 뭐냐면, 제자리에서 계속 뛰라는 거죠. 전 2기 졸업생 여러분들이 빨리 뛰거나 멀리 달려 나가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잔발로 멈추지 않으시길 바라요.
산행 얘기가 나온 김에 좀 더 해볼게요. 저는 주로 혼자 산에 가는데요. 여성은 혼자 산에 가도 참 거추장스러운 일들이 생깁니다. 제 나이 오십 하나인데도 그래요. 호구조사까진 아니더라도 산에서 굳이 궁금해하지 않아도 될 질문들을 받거나 그들만의 호의에 썩은 미소를 지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산행 중에 쉬다가도 뒤에서 남성 산행객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얼른 자리를 뜨곤 합니다. 소위 엮이고 싶지 않아서이지요. 정말 싫거든요. 자기들이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질문을 거두지 않는 그들의 무례함에 진저리가 쳐져요.
잠깐 다른 얘기를 할게요. 어제 삼거리에 있는 편의점에서 알바하는 친구한테 들은 얘기입니다. 다른 책 읽기 모임에서도 나눈 얘기지만 또 하고 싶어요. 삼거리엔 임신한 유기견이 살고 있어요. 우리의 전담교수인 탱자씨(앗)께서도 그 친구가 먹을 일용할 양식을 편의점에 맡겨놔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사료를 편의점 주인장께서 삼거리 댕댕이에게 주셨고요. 한데 어제 산모가 해산을 했대요. 여섯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고 합니다. 산모가 몸을 풀자, 산모가 은신처로 삼았던 땅 주인은 기꺼이 산모와 새끼가 머물 거처를 내주셨고, 삼거리 이발소 사장님은 젖이 모자랄까 봐 우유를 가져다주셨으며, 삼거리의 또 다른 주민은 사료값은 내가 내겠다고 자청하셨고, 우리의 철물점 사장님은 산모와 새끼들이 안전하게 쉴 수 있도록 거처 주변에 철망을 둘러주겠다고 하셨대요.
엊그제 어떤 에코페미니즘 강의를 들었습니다. 강사분께선 공유지와 공동체의 연대, 유대, 지지를 강조하시면서 그곳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셨어요. 하지만 산내 삼거리 유기견을 돌본 존재들 중 여성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해산의 순간, 산모와 새끼들을 돌 본 당사자들은 지정 성별 남성인 분이었어요. 이럴 때 성별이 대체 뭐가 중요한가요. 우리는 약한 존재, 도움이 필요한 존재를 보고 알아채는 이미 그런 존재들인 걸요.
아까 산에서 절 귀찮게 하는 남성들을 따돌렸다는 얘기드렸잖아요. 근데 산을 내려오다가 잠시 발이 미끄러졌습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만약 이 산에서 다치면 누가 날 구해주지? 여러분? 은 아니잖아요. 제가 귀찮게 생각하고 실은 살짝 미워했을지도 모를 바로 그 무례한 남성들이겠죠. 그들은 삼거리의 해산한 댕댕이와 새끼가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걸 금세 알아챈 주민들처럼 저를 도와야 한다는 걸 바로 알아챌 것이고, 제가 필요한 도움을 청하지 않아도 제게 줄 것이에요. 저는 요즘 근대와 함께 등장한 개인을 어떻게 해야 더 이상 원자화, 파편화하지 않을 수 있을지에 관심이 많아요. 너무나 유구한 근대의 기획을 제가 한 번에 어찌할 수는 없겠지만, 계속 잔발로 뛰면서 보폭을 좁히면서 멈추지 않으려 해요. 그 잔망스러운 뜀박질을 2기 여러분들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졸업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