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통의 감각

-살림이라는 삶

by 정상순

방학이다. 방학이 돌아오면 삼모녀는 거실 탁자에 둘러앉아 방학 계획을 짠다. 끼니를 준비(설거지와 뒷정리 포함)하거나 빨래를 돌리는(널고 걷고 개기 포함) 일은 우리 집에선 십 대 청소년에게도 분명하게 가시화된 노동이다. 그러나 가려지고 숨겨지고 드러나지 않는 노동,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지 않으면 삶이라는 수레바퀴 자체가 아예 돌아가지 않는 노동, 그것이 가사노동의 속성이기도 하다.


우리 집 화장실은 생태 뒷간이다. 볼일을 보고 나서 결과물을 물로 흘려보내는 시스템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말인즉슨, 석 달에 한번 꼴로 똥을 퍼내야 하고, 매일 아침 오줌이 찬 통을 새 톱밥이 담긴 통으로 바꿔줘야 한다는 뜻이다. 오줌은 사흘 정도 삭혀 밭에 뿌리거나 나무 거름으로 쓴다. 밤새 거실 한편에서 잠을 청한 반려견 뭉치는 식구들이 일어나길 기다렸다가 기척이 나면 자신을 밖으로 내보내 달라고 말한다. 뭉치를 현관 바깥쪽 데크로 옮겨주고 거실에 마련해 두었던 뭉치 자리를 털고 햇볕에 너는 일도 한솥밥을 먹는 우리 중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다.


겨울이면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어난다. 난로를 때서 집안에 온기를 유지하는 일이 그것이다. 아낌없이 제 몸을 태워낸 나무는 재를 남긴다. 난로 구석구석에 남아있는 재를 걷어내고 음식물 쓰레기 주변에 재를 뿌려준 후 난로 주위를 청결하게 유지하는 일도 중요한 집안일 중 하나다.


첫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집안일을 나눠했다. 작은 아이는 언니를 따라 시작했으니 좀 더 빨랐다. 엄마가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아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기도 했다. 제 밥은 제가 해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제일 먼저 끼니를 해결하는 법을 가르쳤다. 지금은 제법 할 줄 아는 메뉴가 많아졌다. 내년이면 큰 아이가 고등학생 나이로 접어드니 공식적으로 집안일을 함께 한지 6년이 넘었다. 우리가 함께 하는 방식은 거의 분담 혹은 분업이었는데 이 방식은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맡은 일 이외의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 일이 아니라는 감각이었다. 나는 그걸 고립의 감각이라고 부른다. 집안일은 분담 혹은 분업만으로 충분치 않다. 경계선 상의 가리어진 노동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설거지를 한 다음 싱크대는 누가 닦는가. 식탁을 닦아낸 행주는 누가 빠는가. 이 연쇄적인 노동에 당번을 붙이다가 깨닫게 될 배움은 오직 하나, 집안일엔 끝이 없다는 단 하나의 진실이다.


올 겨울 삼모녀는 당번제를 최소화하기로 했다. 먼저 눈에 들어온 사람이 그 일을 하기로 했다. 아침 체조를 하는 동안 큰 아이가 뭉치를 데크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소리가 나면 나는 체조를 마친 후, 뭉치의 자리를 걷고 청소기를 가볍게 돌린다. 뭉치 이불을 너는 일은 내 일이기도 하고 큰 아이 몫이기도 하다. 매일매일 일의 주인공이 바뀐다. 작은 아이는 조금 늦게 일어나는 편이라 나와 큰아이의 일이 마무리될 즈음 뭉치와 함께 산책을 나선다.


오늘 아침 격자무늬 창호의 먼지를 일일이 닦아내던 큰 아이가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아무것도 못했어." 나는 아이에게 먼지를 닦아내라고 말한 일이 없지만 집안일에 심취(!) 한 아이는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하는 중이다. 아이에게 물었다. "그게 어떤 느낌인지 설명해 줄 수 있어?" 아이는 한 동안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렇게 말했다. "시간을 아주 잘 못 쓰고 있는 느낌이야." 나는 내 아이에게 가사노동의 고귀함을 설파할 생각은 없다. 필수적인 노동이지만 그것이 고귀한 것으로, 뭔가 특별한 것으로 취급되는 순간, 우리는 다시 함정에 빠진다. "그 느낌 뭔지 알아. 그래서 기억해야 해. 하지 않으면 삶이 유지되는 않는 집안일이지만 이걸 누군가가 혼자서 해야 한다면 얼마나 불행해질지."


무조건, 누구나, 예외 없이 해야 하는 노동. 그 노동의 이름은 가사노동이다. 고립의 감각이 아닌 공통의 감각만이 삶을 살려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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