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조건(1-1)

9화

by 무유

9화 결혼조건(1-1)

이 이야기도 짝사랑이야기다.

때는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전인 초여름의 전학생이었다.

공부로 잘하기로 알려진 곳에서 전학을 왔다.

누구나 좋아할 외모에

또래의 아이처럼 이상한 장난을 치지도 않고

할 말은 다 하면서

역시나 공부도 잘하고

또래와 다르게 여자 아이들과 소통도 되고

다 갖춰진

그 나이에 내면이 단단해서 보기 드물고

아이 같지 않은 애늙은이 같은 아이였다.


전학 온 첫날,

반에 들어올 때부터

얼굴 보고 첫눈에 반했다.

안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 보니 꽤 좋아했던 여자들이 많았다.

하굣길에는 좋아하는 여자아이들이

그 아이를 쫓아가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 무리에 끼지 않았다.


자존심이랄까,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그 아이의 마음을 얻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말을 걸지 못했다.

말을 걸지 못했던 이유는

그 아이만의 존재하는 선이 보였다.

기준은 잘 모르겠으나

어느 선을 넘었다고 생각이 들면은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을 무시했다.


남자아이들과는 씩씩대며 몸싸움도 했었고

먼저 시비를 거는 편도 아니었지만

시비를 걸어오면은 참지 않았다.


그런 점이 더 매력적이었다.




같은 반의 친구로 지켜보다가

여름방학이 코앞으로 왔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

친구들은 여기저기 휴가로 놀러 가거나

시골에 가거나

조부모댁, 친척집에 가곤 했다.

여름방학인데도 어디에도 가지 않고

아침시간에 학교에서

특강 학습을 들었는데

수업을 듣고 싶어서 들은 것이 아니었다.

엄마의 강압으로 들었다.

그러니 수업의 첫날은 울상이었다.

늦게까지 잘 수 없고

아침부터 일어나 학교에 가야 하다니,

입은 대빨 나와있었다.

느릿느릿,

가기가 싫은 발걸음이 무거웠다.

지각을 면할 정도로 도착해 수업실의 뒷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을 연다는 것이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쾅-

선생님과 아이들은 뒷문을 연 나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민망스러운 감정도 잠시,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그 아이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 아이는

반갑다는 미소를 지었다.

분명 선이 존재했는데 옅. 어. 졌. 다.

호의적이었다.


같은 반이었지만

친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특강에서 만난 전학생은

마음을 열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허물어졌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특강을 다 듣고 하굣길에 그 아이가 뒤에서

이름을 불렀다.

대뜸 말을 걸어오는 그 아이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일상이 되었다.

옆 아파트에 살아서 집 가는 방향도 같았고

친구라는 이름으로

이성으로는 다가가지 못하고 지냈다.

하굣길마다 얘기를 나눴다.


무슨 이야기였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주로 그 아이가 말을 많이 했고

들어주고 적당한 리액션을 하고

친구같이 지냈다.

오히려 내가 마음을 열지 못했다.

좋아하는 마음을 전혀 티 내고 싶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일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조용하다 싶으면 꼭 일이 터졌다.



그날도 똑같이 수업이 끝났고

짐을 챙기고 화장실을 들렀다가 나오니

아이들이 벌써 집으로 갔는지 조용했다.

얼른 집에나 가야지 하고 있는데

뒤에서 헐레벌떡 그 아이가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유야!

또 늘 그렇듯 그 아이가 이야기를 꺼냈다.

일상적인 대화를 하고 적당한 리액션을 보였는데


그날은 평소와 달랐다.

말을 이어가는 도중에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아이의 입에선

청.천.벽.력. 같은 말이 들렸다.


그 아이가 곧 이사를 갈 수 있다고 했다.

‘이사 온 아이가 또 이사를 간다고???’

놀랐지만 애써 감정을 감춘 채, 말을 이어갔다.


언제 가는데? 하니

여름방학이 끝나기 전? 이라고 대답했고


그날 잠이 안 왔다.


늘 이기던 세계챔피언이

중요한 권투시합에서

링에 올라 후반전으로 치닫고 우승을 예감하던 찰나

갑자기 관객으로 보고 있던 짝사랑하던 남자가

큰 소리로 “나 이사가!”라고 외치고

세계챔피언은 뮝? 하는 순간

뒤통수를 세게 맞아

링 위에 맥없이 쓰러져

세계챔피언을 뺏긴 사람처럼

루저가 된 기분이었다.


이렇게 마음도 표현하지 못하고 보낼 수는 없어!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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