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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ia Dec 19. 2022

바다를 건너는 사람의 마음

최지인, <섬>에 기대어


                                                         최지인


  바위 위 사마귀

  바위색 사마귀

  그것들 뒤로 그림자

  나는 벌써 백발이 되었다


  그날 운세는 이러했다

  쪽배가 큰 파도를 만나 예상치 못한 일로 변고를 당할 수

있다

  그러나 절대 불의를 행하지 마라


  트럭을 피하려다 벽에 차를 박았다

  보조석 범퍼가 깊게 파였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어제는 저녁에 한강공원을 걸었다

  죽은 지렁이들을 보았다


  실패한 사랑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괜찮은 변

명거리다

  누구나 실패하니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순 없다


  경광봉을 흔드는 한 사람과

  참 캄캄한 하늘

  네가 가리킨 것은

  맑고 향기로운 잘못들이었다


  너는 슬퍼지지 않는 것 따위는 삶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

람이었고

  나무들 사이를 지나는데

  손끝이 닿았다

  다음 생은 엉망으로 살고 싶어, 마음껏 엉엉 울고 그 누구

도 되지 않는, 그럼 아쉬워도 태어나지 않겠지, 나뭇가지에

옷을 걸어두고 이제 여름으로, 여름으로


  사랑한다 말하면 무섭다

  그것이 나를 파괴할 걸 안다


  초파리가 과일 껍질 위를 맴돌고 있다

  옆으로 돌아누운 너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

  네가 거기 있다는 걸 알 수 없듯이

  서성이는 슬픔


  저 멀리 섬들 보인다

  이제 바다를 건널 것이다




요즘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슬플 때마다 시를 읽는다.

어릴 적엔 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시에 흠뻑 젖어 헤엄치며 읽고 또 읽고 싶은데 학교에서는 자꾸만 시를 해부하라고 해서 화가 났었던 것 같다.

심지어 다음 국어 시간에 이번에 배운 시를 외우지 못하면 손바닥을 때리기까지 했으니, 시를 좋아하고 싶어도 여유가 없었다.

시라는 걸 그저 직관적으로, 읽히는 대로 이해하면 안 되는 걸까?

쓴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썼는지를 그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알지?

만약 내가 지금 해석한 것이, 선생님이 해석해주는 내용이, 혹은 참고서의 내용이 진짜 시인의 마음이 아니면 어쩌지? 등의 생각이 더 많아져서 말이다.


지난여름 내내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수업에서 소리 내어 함께 시를 읽어 내려가면서 그동안 담을 쌓았던 시에게 마음을 활짝 열었다.

강사님은 우리에게 시를 그냥 읽어도 된다고 했다. 소리 내어 읽은 후 시에 대한 감상을 나눌 때는 직관적인 우리의 생각들이 다 옳다했다. 다 이해하지 않아도, 어렵게 느껴져도 괜찮다 했다.

시를 그저 읽히는 대로 읽고, 받아들여지는 대로 받고, 느끼는 대로 말할 수 있게 되다 보니 마음의 지경이 다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시인의 시대 상황과, 쓰인 시간과, 시인이 살아온 삶의 정황과 궤적을 알고 나면 시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어 좋긴 했지만, 처음엔 그런 것들도 우선 두고 소리 내어 읽으며 감각적으로 시를 누렸다.

어떤 시는 꼭 내 이야기 같아 눈물이 핑 돌았고, 어떤 시는 기하학무늬를 만난 느낌이기도 했다.

내용은 모르겠지만 색깔로 느껴지는 시도 있었다.

어떤 시에서는 맛이 느껴지기도 하고, 향기가 나기도 했다.

그러고 나니 힘들고 어려운 시간에 기댈 수 있는 존재들이 늘어간다.

시집을 하나 둘 모으며 새로운 세계를 만나간다.


최지인 시인의 시를 처음 만났을 때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구절구절을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행간에 스며든 감정이나 눈에 띄는 구절들이 꼭 나의 어린 시절의 한 구석을 사진처럼 보게 하는 느낌이었다.

반가운 만큼 아프기도 했다. 도대체 이 시인은 어떤 삶을 살아왔길래 이렇게 아픈 시를 쓰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제목과 내용을 매치시켜보려 애쓰기도 했고, 연과 연의 연관성을 찾으려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새 직관적으로 읽으며 시구에서 위로를 받고 있다.


시집의 제목처럼 일하고 일하는, 그럼에도 사랑을 놓지 않고, 절망스러운 일들을 목도해도 희망을 놓지 않는 화자로 인해 절망스럽게만 보이는 현대사회의 사건 사고들 속에서도 그럼에도 고개를 들어 하루를 더 살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러나 절대 불의를 행하지 마라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나무들 사이를 지나는데 손끝이 닿았다
저 멀리 섬들 보인다  이제 바다를 건널 것이다



나는 여전히 시를 모르고, 직관적인 위로를 받는 초보적 독자이지만

오지 않을 꿈 같은 핑크빛 희망이 아닌,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는,

삶의 무게가 짓눌러도 다음 섬으로 향하는,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게 하는 시인의 언어들이 힘이 된다.


오늘의 시가 고된 하루를 지나는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 다음 섬을 향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함께 듣기]

https://youtu.be/x1Yv7u2EboU

[Spot to Life] 「섬」, 「이번 여름의 일」 - 최지인 | 출처: unlook YouTube 계정


[함께 읽기] 최지인 시인의 시 '섬' 전문이 실린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http://aladin.kr/p/lf1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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